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8>
<정의(definition)가 혼돈된 시대를 살다 >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정의를 잘못 내리면 그 방향과 길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됩니다.
공부를 잘 해야만 행복하다는 정의가 내려지면 사람은 공부에 전부를 걸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인생은 끝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가치가 혼돈된 곳에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이민 2세들이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남아공이민 2세들은 한국어를 너무 잘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상위가치를 따라가게 됩니다.
내가 속한 문화의 가치보다 더 상위 가치가 있다면 사람은 그 가치를 위해 내가 가진 가치를 버립니다.
왜 미국으로 이민을 간 2세들은 한국말을 못하는가?
그것은 부모의 가치의 정의 속에 한국의 가치는 미국에 비해 하류가치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말을 못해도 되니 영어를 잘 알아야 한다는 정의가 그 속에 베여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고 영어만 가르치고 영어를 잘하면 모든 것이 괜찮은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미국의 주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가치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간다는 것 자체는 상위가치에 대한 꿈의 성취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 삶 속에 한국 말이라는 것은 버려도 되는 가치입니다.
남아공에 사는 아이들은 한국말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가치입니다.
부모의 가치 속에는 한국과 남아공 중에 상위가치는 한국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가치의 상징인 한국 말은 절대 잊지 않도록 아이들을 교육시킵니다.
어느 가치를 따를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결국 언어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미국에 속한 이민 교회는 두 가지 회중이 있습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회중과
영어를 사용하는 영어회중입니다.
한 지붕 두 가족입니다.
세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교회의 모습입니다.
상위 가치를 좇던 사람들, 한국보다 더 나은 세상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에게 오직 영어라는
미국이라는 상위가치를 이루기 위한 삶의 정의에서 나온 부산물이 바로 한 지붕 두 가족입니다.
미국에서 살았던 이민 1.5세대 목사님께 이 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더 마음 아팠습니다.
그렇게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에 목숨을 걸었는데
학교에서 적응도 못할 뿐더러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 아이들의 70%가
영어로 기도도 제대로 못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상위 가치를 위해 한국말을 버려서 이제는 한국말도 못할 뿐더러
영어로 기도 한번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어회중을 담임하는 이민 1.5세대 목사님의 고백이니 아마 정확할 것 같습니다.
오직 상위 가치만을 추구하는 공동체와 개인이 맞게 되는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혼돈되어지면 역시 혼돈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바로 지금이 그런 시대입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정의가 나를 가롯유다로도 만들고
나를 베드로로도 만듭니다.
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짧은 시간에 부흥을 했는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겨우 몇 십 년이 지나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는 기독교는 또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정의가 잘못되어서 입니다.
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수 천명씩 따라 다녔습니까?
이것을 <부흥>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3년 동안 수 천명씩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온 도시가 환영을 하고 우리의 왕이 되라고
말한 이것을 우리는 부흥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몇 십 년 동안 예수님을 믿기 위해 수 없이 따라 다닌 한국교회의 이런 형상이
혹시 삼 년 동안 예수님을 수 없이 따라다닌 군중들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야 한다.
또 군중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또 한국교회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부흥하고
또 금방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없이 사라진 군중들처럼 지금 교회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과 지금 한국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부흥한 것과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상위 가치>에 대한 혼돈입니다.
왜 한국이 미국에 열광합니까?
왜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버려서라도 영어와 미국의 주류사회에 들어가려 합니까?
그것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가치의 오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알지 못하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오직 세상에 없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땅에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주지 못하는 생명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귀하게 여겨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더 나은 가치로서의 <믿음>입니다.
군중에게 최고의 가치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게 됨으로 얻어지는 세상의 가치였습니다.
더 나은 상위가치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 였을뿐 자신의 인생에 그것을 해결해줄 다른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생명보다 더 나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상위 가치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치에 대한 정의가 혼돈되어져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며 달려왔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해 교회도 버리고
예수도 버리고
믿음도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나라는 세상나라보다 상위 가치입니까?
당신이 상위 가치를 얻기 위해 포기 하는 것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어떤 것이 당신에게 상위 가치이고
어떤 것이 당신에게 버려야 할 하위 가치인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전부를 다 팔아 그것을 사게 됩니다.
마치 한국의 전부를 버리고 미국을 택한 몇 십 년 전의 이민자들처럼
내가 전부를 거는 그것이 곧 당신의 상위 가치인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하지만 말이 아니라 내가 버림으로 얻게 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상위 가치에 대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수천, 아니 온 도시가 예수님을 따르고 환호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더 나은 상위가치를 얻으려는
가치의 정의에 대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의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외쳐도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정의는 곧
상위 가치에 대한 정의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둘째, 십자가에 대한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자발적 포기>입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삶 가운데 가장 성령이 충만한 시간은 어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입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성령이 충만한 때는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모든 인성과 신성의 총합은 오직 십자가를 향했고
그 사역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오직 이 때를 위해 왔고 이때를 이루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왜 성령의 가장 충만함이라고 말합니까?
십자가를 지지 못해서 십자가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그대로 있는 것,
힘있는 자에게,
내려올 능력이 있는 자에게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자격을 조롱할 때
얼마든지 내려올 힘이 있으나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 전 기도하셨을까요?
자신이 이 십자가를 벗어나고 지지 않을 능력이 없어서 기도했을까요?
아닙니다.
지지 않아도 될,
십자가에서 내려올 힘도 능력도 자격도 있지만
누림에 대한,
자격에 대한 <자발적 포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과 예수님이 다른 것은 군인데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15:21)
십자가를 지는 인생도 두 가지 입니다.
<억지로> 지는 자와
<자발적>으로 지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격에 대한
<자발적 포기>에 의한 십자가입니다.
자발적 포기가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기를 먼저 배불리고
자기를 먼저 구원하고
자기를 먼저 챙기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는 <자발적 포기의 기도>였습니다.
내 배를 먼저 채우기 위해
돌이 떡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를 먼저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보다 세상을,
나보다 저 형제를,
나보다 하나님이 품은
영혼에 대한
자격에 대한
구원에 대한
축복에 대한
<자발적 포기>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은 이 <자발적 포기>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의가 혼돈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힘을 쓰지 못해서 십자가가 아닌데,
우리는 힘을 쓰기 위해 십자가를 찾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가 아닌데
우리는 능력이 필요해서 십자가를 찾습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가 아닌데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찾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자발적 포기의 가장 성령 충만한 최고의 자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자발적 포기로 정의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오직 나만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에 오직 나만 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에는 이 자발적 포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더 나은 상위 가치를 이루려는 군중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셋째, <자격>에 대한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자격입니다.
자격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혼돈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라는 말로 세상에서 그 자격을 누리려합니다.
남들보다 더 잘되고
세상보다 더 높아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잘됨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단이 시험한 것은 에덴동산에서도 광야에서도 바로 이 자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자격입니다.
이 자격에 대한 정의 가 잘못되면 교회는 망합니다.
자격은 <누림>이 아니라
<내어줌>입니다.
교회 역사상 이 자격,
하나님이 주신 신분,
하나님의 주신 자리를 누림으로 여기고
온 세상에 이 자격과 누림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고
권력을 지키려 했던 모든 곳은 망했습니다.
교회가 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가는 길과 반대의 길로 가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자격>은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목사로서의 자격을 많이 누리려 합니다.
성도들에게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자격을 누리려 합니다.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자격에 맞는 옷과
자리와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또 그렇게 대우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데라고 도리어 화를 냅니다.
자격은 누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자격은 <내어줌>입니다.
누림만 있고 내어줌은 사라지는 교회!
십자가의 길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역자 뿐만 아닙니다.
성도들은 더합니다.
평생 주여주여를 외치고 살지만 그 마음속에는 늘 <자격>을 가지려는 본심입니다.
누림이 오직 주여를 외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의 요구는 늘 이 자격이었습니다.
우편 자리 좌편 자리입니다.
본심은 자격의 누림입니다.
세상에서 힘 있음을,
자격 있음을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증명하려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나의 자격을 누림이 아니라 내어줌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내 평생의 수고를 보상해 줄 것인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전제는 믿음입니다.
철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십자가의 길,
자격에 대한 누림이 아니라 내어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격도 내어주고
자신의 옷도 제비 뽑도록 내어주는 것입니다.
옷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격입니다.
자격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입니다.
그 신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내어준 옷은 자격을 내어준 것입니다.
누림을 내어준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아버지 집에 왔을 때 다시 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입니다.
아버지는 그 옷을 입혔고 세상은 그 옷을 벗겼습니다.
세상은 그 옷을 유혹하며 다시 보디발의 아내가 벗깁니다.
그것이 조롱이고 그것이 모함이고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그 옷을 벗도록 내어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라고 그 옷을 입으려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격을 보여주기 위해 더더욱 그 채색옷을 입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벗기시는데
하나님은 그 옷을 벗어야 영광을 본다 하시는데
우리는 더더욱 소리치며 아멘 하며 옷을 입으려 자격을 가지려 합니다.
그곳에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자격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가죽옷입니다.
옷은 자격입니다.
내가 입은 세상의 누더기를 벗어야 새로운 세마포를 입습니다.
내 옷을 벗는 자격을 누림이 아니라 내어주어야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습니다.
예수 믿는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상위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의가 혼돈된 시대입니다.
십자가는 <자발적 포기>입니다.
자격은 <누림>이 아니라 <버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자격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격을 버리고 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누림>이 아닌 <버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
십자가,
자격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돈으로 교회가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합니다.
혼돈된 정의가 우리의 머리 속에서 바뀌지 않으면
소망은 없습니다.
지난 2,30년 동안 우리 속에 박힌 잘못된 정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역시 우리를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은 오직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정의에 대한 교육입니다.
우리가 알던 정의(definition)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뀝니다.
* 우리는 꽃이 되려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꽃의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꽃을 피우는 인생…
아닙니다.
꽃의 영광은 내어줌입니다.
꿀도 내어주고
화려함도 내어주고
그리고 시들어지고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부활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광은 버림을 전제합니다.
자발적 포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화려한 꽃의 영광만 보고
떨어지고 버려지는 자발적 포기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
믿음의 길은 바로 꽃의 영광이 아니라
내어줌과 버림의 자발적 포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