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7>
< 분노와 화! 이루지 못한 꿈의 다른 얼굴! >
내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좌절을 겪은 사람이 어떤 사람에 더 많이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야망의 성취를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려는 것입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어떤 다른 대상을 통해 이루려는 것!
지금 이 시대에는 몇 가지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내 꿈을 이루려는 것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인가를 말입니다.
상처가 많고 좌절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교회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어떤 꿈을 교회가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있고 성도에게도 있습니다.
교회를 더 많이 성장 시킨다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비전을 가장해서 자신의 야망을 교회를 통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려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면 당신의 은사와 물질과 시간을 위해 전부를 헌신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지 않고 자신의 성취를 위해 목사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성도들을 이용해서 그 꿈을 이루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했던 제자들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헌신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요구 속에는
내가 이루지 못한 어떤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요구가 더 많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힘들게 지낸 사람이거나 거절당하고 외면당하며
인생의 굴곡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요구는 더 거칠고 집요하게 다가옵니다.
자신이 정한 어떤 기준으로 하나님이 되어 그 기준을 교회와 목사와 지도자에게 풀어냅니다.
'이 일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협박과 압력과 폭언과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좌절된 꿈의 보상의 마지막 보루로 교회를 택했는데
그 교회가 자신의 기준과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좌절된 꿈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다시 거절감과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리가 나오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왜 꼭 하나님의 나라와 꿈을 그 곳에서만 풀려 하십니까?
그런 분들은 그냥 선교지로 가십시오.
가난하고 힘든 자들,
나름 정의로움을 펼치기에 너무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고
예수님의 비전도 아닙니다.
다만 내 좌절된 꿈과 야망을 이루어줄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지
참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반복되는 거절감과 이루지 못하는 꿈에 대한 상처가 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한번씩 한국을 가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참을 수 없는 상태로 산다는 것을 봅니다.
분노가 차고 화가 차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로 한국 사람들은 다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최근 몇 년은 나름 풀어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말씀 드린 원두 커피이고 등산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도
좋은 직장을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고
평생을 벌어도 집을 한 채 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우며
그나마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살고 싶은 꿈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이뤄지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며
학생들은 부모의 기대에
직장인들은 청년들은 다들 이루지 못할 꿈 앞에 절망과 좌절을 지나
이제는 화와 분노로 우리의 삶을 이렇게 만든
사회와 국가를 향해 쏟아 내 놓는 것입니다.
화와 분노!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또 다른 얼굴입니다.
지금은 이것이 사회화 되어져서 붉어져 나오지만
이미 교회는 수년 전부터 이런 현상들이 있어 왔습니다.
나름 열정적으로 살아온 성도들,
나름 의식과 기준을 가진 성도들이 그들의 열심으로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 절망에서 나온 화와 분을 교회에 쏟아내 놓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먼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크나큰 기대감과 이상과 꿈은 더 큰 좌절을 주고
좌절은 상처가 되어 화와 분노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입니다.
시대의 흐름은 자녀의 성공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너나 없이 더욱이 교회가 앞장서서 세상적으로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에 돈 잘 버는 일에 최전방에서 아이들을 부추길까요?
왜 유독 한국은 교육열이 강할까요?
그리고 왜 유독 한국의 가정들이 더 많이 자녀와의 갈등이 심할까요?
교회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이루려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한국은 상처가 많고 거절감과 가난의 과거를 지났기 때문에 더더욱 성공과 꿈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 꿈과 성공에 대한 집착이
자녀에 대한 집착으로 변한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집착과 화와 분노의 근원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의 좌절과 비례합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요구를 강력하게 원하며 표현하는 분들은
아마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좋은 관계로 지내는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개인의 야망은 예수님과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또 자녀와 가족에게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비전을 위해 전부를 걸고 달려가는 것이 한국입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줄 대상으로 교회가 되고
그리고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비전을 가장한 야망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이루지 못하는 꿈에 대한 상처와 분노가 자녀에게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상처의 악순환입니다.
상처를 받은 그 자녀는 또 상처를 낳고 상처의 가정으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에서 나온
<비전>은 결국 상처가 되고
<칼>이 되어 자녀를 찌르는 것입니다.
<자녀>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비전>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일등을 해야 행복하고
최고를 해야 행복하기 때문에 일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비전을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또 다른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와 자녀에 대한 갈등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자녀가 그렇게 반항을 합니까?
왜 자녀가 부모를 외면합니까?
어릴적부터 무엇을 안다고 그들이 그렇게 자랐겠습니까?
늘 비교 당하고
늘 경쟁 당하고
늘 부모의 비전을 대신 이루기 위해 일등을 향해 서열이 정해지고
등수가 매겨지고
인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벌레로 자라서입니다.
그 상처와 아픔 속에 자녀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부모의 비전을 이루다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는 만 5살과 7살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데 한국 말이 아니라 외국어를 사용해야 하는
극도의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국 같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을 너무 행복해 합니다.
학교 가는 것을 기다리고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기다립니다.
언어에 뛰어나지 못하고 성적을 지난 학기에 받아왔는데
그저 그렇습니다.
성적이 이 정도라면 한국에서는 분명히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눈물 흘리고 울며 불며 할 텐데
여기서 아이들은 너무 행복하게 다닙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남아공은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개인의 가치와 인격에 대한 존중이 강한 나라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누구도 비교하지 않고
잘하는 아이는 그냥 잘하는 아이입니다.
그것이 인생 자체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 아이의 성적이 갈등의 원인이 됩니까?
내 비전을 이루어줄 꿈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 화와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일등 하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여러분의 아이들은
세상과 등을 지고
세상으로부터의 상처를 가지고
깨진 관계 속에서 자라나서 결국 또 다른 상처로 가정을 꾸리고
교회를 가서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그들에게 요구하고 관계가 깨진 상태로 살아가는 악순환이 진행됩니다.
세상이 주는 가장 강력한 유혹!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되는 비전을 우리는 교회에 요구하고
자녀에게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분노와 화로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교회와 안녕하십니까?
혹시,
풀지 못하는 분노와 화를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가족을 대하고
내가 다니는 목사님을 대하고 교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아닙니까?
분노와 화!
이루지 못한 내 꿈의 또 다른 얼굴은 아닙니까?
비전을 내려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분노와 화의 근원은 교회와 자녀가 아니라
여러분의 이루지 못한 비전이며 비전을 가장한 야망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되려는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최근에 교회 개척을 하기 위해 부흥회를 하다 길에서 만난 들꽃 입니다.
분노와 화로 가득한 세상에 웃음으로 대하는 이름없는 들풀입니다.
각자의 모습 그대로 가장 존귀하게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다른 비전으로 우리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그냥 웃으면 안될까요?
우리 그냥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신 예수님 때문에
그냥 웃으면 안될까요?
어떤 조건이 아니라 그냥 웃으면
성령님이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행복해 하지 않을까요?
더 못날 때도 받으셨는데
더 없어도 받으셨는데
뭘 그리 이루려고 달려가십니까?
그냥 함께한 가족들 내 자녀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말하는 것!
그것이 성경적인 삶이 아닐까요?
분노와 화!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몰라
나만의 비전으로 살려는 욕심의 다른 얼굴,
좌절된 비전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
웃으십시오~
웃으면 세상도
내 인생도 환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