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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5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이 되다>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5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이 되다>

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5>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이 되다>

 

 

세상이 만들어질 유일하게 기준을 정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선악과> 입니다.

 

하나님이 되느냐 인간이 되느냐의 선은 <기준>입니다.

선악과의 다른 의미는 기준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 그것이 인간에게 선악과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다른 것은 기준을 정한 주체와 객체로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 다시 죽음으로 덮였습니다.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다시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 만이 <기준>입니다.

 

 

첫째, 세상의 싸움은 <기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내가 정한 기준으로 사느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느냐는

내가 정한 기준으로 사느냐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나를 순복하느냐 입니다.

 

복음은 기준으로 살던 인생,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겠다는 자기 포기이고

자기 기준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자기가 세운 기준에는 생명도 소망도 답도 길도 없음을 말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인생에게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기준임을 고백하는 !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시대는 자기 기준으로 다시 하나님이 되려 하는 시대입니다.

 

사단이 찾아온 것은 지옥이 아닙니다.

사단이 찾아온 곳은 천국 가운데 입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찾아와서 말은 네가 기준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아니라 사단이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으리라 했지만 사단은 죽지 않으리라 합니다.

<새로운 기준의 등장>입니다.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유일하던 에덴동산에

새로운 기준이 등장한 것입니다.

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준의 등장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기준을 정하고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며 평가하며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믿음을 회복했다는 것은

자기 기준으로 살던 인생이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입니까?

구약에서의 성령의 상징은 이끄심입니다.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이스라엘백성을 이끄셨던 것이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성령의 이끄심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입니다.

무수한 자기 기준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한다는 자기 기준으로 목회를 합니다.

목사는 이래야한다는 기준으로 목사를 평가합니다.

시대의 문제는 <기준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시고 성령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의 기준이 성령임을 말합니다.

성령의 이끄심과 인도하심이 아니라

자기기 정한 기준의 부활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사람을 평가하고

교회를 평가하고

자기가 정한 목표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솔직히 생각하고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으로 세운 기준과 목표가

성령의 인도와 이끄심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한 기준과 목표인지 말입니다.

 

목사가 정한 교회의 목표가 있습니다.

성도가 정한 목사의 기준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이 이끌지 않으시는 기준,

성령이 바람처럼,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던 인도하심의 기준이 아닌데

우리가 세운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고 공동체를 이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앞서며 하나님의 기준에 내가 가로채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회복은 성령의 이끄심의 기준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목사님이 이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성도가 이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얼마나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은 것은 마귀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성령 충만한 장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곳이 아니라

십자가 위입니다.

 

성령의 인도보다 앞서는 모든 기준은 내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이끄신 성령의 이끄심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목사의 약함을 용납하지 못하고

성도의 연약함을 허락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일을 통해 어떻게 나의 인생과 공동체를 이끄실 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실수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기준을

목사에게 교회에게 사람에게 성도에게 들이 대는 것입니다.

 

결국 유일한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을 아니라

새로운 기준의 부활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기준의 부활은 무엇을 잘한다 못한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말한 사단의 소리에

시대의 새로운 선악과를 먹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성령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이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구름 기둥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상징으로서의 광야길이

지금 인생의 길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보다 기준이 소중하고 중요하고

기준으로 전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책으로도 이름이 알려지고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남아공을 오시면 한지역 선교사님에게만 가십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이곳 선교지에서 그렇게 반듯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선교사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진 목사님은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귀하고 위대하고 훌륭한 목사님으로 소개를 하고 말씀을 하셨답니다.

 

이분을 책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분에 대한 존경심이 있지만

사실을 알고 이분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름 선교사님에 대한 기준이 있어서 훌륭한 선교사님으로 인식을 하고

소개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소개한 선교사님을 아는 한인들이나 다른 사역자들에게 선교사님은

한국의 지명도가 높은 목사님이 그렇게 높이 치켜세울만한 사역이나 인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식은 목사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에게 선교사님은 아주 훌륭한 선교사님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도가 선교사님에게 찾아와 선교지에 십일조를 드리고 싶다고 하니

선교사님은 성도에게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라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사실을 알고 목회자는 선교사가 가장 훌륭한 선교사라고 인정하고 챙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자기가 정한 어떤 기준에 들면 사람은 훌륭한 목사이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면이 훌륭하면 사역자는 최고의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까?

 

만약 내가 정한 기준이 하나님보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끄심보다 앞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사람과 교회와 세상을 판단하는 악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까?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과 길과 전할 것을 말씀해 주신다 했습니다.

성령보다 앞서는 기준,

성령보다 앞서는 소견에 옳은 기준으로 교회와 사람을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이 교회를 아파하는 것보다 아파하며

그것이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교회를 많이 위한다는 명분으로 삼지는 않습니까?

 

목사에게 좋은 성도가 어떤 성도입니까?

나에게 물질적으로 챙겨주고

나의 가족을 돌봐주고

헌금을 잘하고

먹을 것과 남모르게 많은 배려를 해주면 좋은 성도입니까?

그런 성도들이 유독 그들의 사업장의 직원들에게 악덕 사업가라고

헌금은 많이 하는데 함께한 직원들의 아픔을 몰라주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한 기준이 바른 것이라 말할 있습니까?

 

성도에게 좋은 목사는 어떤 목사입니까?

한국 교회의 유일한 기준은 설교를 잘하는 목사입니다.

그것이 좋은 목사의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까?

 

위대한 사도 바울은 쓰기는 했지만 말에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못했으면 설교하는데 유두고가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모세는 말도 못해서 아론을 붙여야 만큼 말도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정한 설교를 잘하던 기준으로 따지면 모세는 나가 죽어야 하고

사도 바울은 시골 구석에서 박혀 조용히 목회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내가 정한 기준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삶에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성도는 물질에 대한 기준으로 목회자를 대하고

어떤 성도는 외모에 대한 기준으로 목회자를 대하고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얼마나 공부를 했느냐로 판단하고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얼마나 집안이 좋으냐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정한 기준으로 성도를 대하고

여러분이 정한 기준으로 목사를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목사와 성도를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성도로 보낸

목적으로서의 기준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세가 필요한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필요한 시대가 있습니다.

결정은 성령께서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설교가 필요할 때가 있고

적군들과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투에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모든 자기의 기준으로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 않다

좋은 목회자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질이,

설교가,

외모가,

공부의 정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준이 성령의 인도보다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담임목사님인지

성도가 나에게 주어졌는지

나의 기준보다 성령의 이끄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다시 <기준의 부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는

선악과를 다시 따먹는 아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

교회를 다닌 다는 ,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준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

시대의 문제는

모두 <각자의 기준>으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믿는다면

약해도

부족해도

허물이 있어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준을 내려놓는 믿음이

더더욱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신앙은

<기준의 싸움>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각자 들고 있는 기준을 내려 놓으십시오.

기준이 당신을 하나님처럼 살게 합니다.

성령을 주셨지만 성령이 거부당하고

오직 나의 기준이 공동체와 사람을 망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기준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땅의 교회는 웃음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기준> 때문에 말입니다.

 

 

성령의 기준을 따르십시오.

날마다 성령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기준을 따라 섬김으로 나아가십시오.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의 경험을 깨닫지 못하면

평생 방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나안의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기준으로 순간순간 인도하십니다.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기준이 아니라

주시는 마음과 기준을 따라 순종하십시오.

 

구름이 뜨고 기둥이 움직일 그저 따르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곳에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 꽃의 화려함이 이쁩니다.

그러나 꽃이 태양을 가리지 못합니다.

꽃은 꽃입니다.

태양을 비교하는 꽃으로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태양 아래 살면서 세상에 보이는

이쁨이라는 <기준>으로 태양을 가리려합니다.

 

보기에 좋은 이쁨이 기준이 되고

보기에 아름다움이 기준이 되고

내가 세운 의로움이 기준이 되고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기준이 됩니다.

 

내가 세운 기준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기준을 내려 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준의 포기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삶에 천국의 기쁨이 없을까요?

기준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하나가 아닐 그곳은 천국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 이전에

< 기준의 싸움>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