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4>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서울시장을 나오는 분이 서울시내 버스비가 70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분이 서울 시장을 할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숨통이 막힐 것입니다.
일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주위에는 일하는 사람만 있지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선교사입니다.
저는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역자들의 생활비가 얼마나 필요하고
성도들의 수입이 얼마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비가 얼마고 아이들 학비가 얼마며
하루에 몇 끼를 먹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없음에 답을 주시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신음 소리의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알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던지는 진리와 외치는 소리는 잠시 속이는 진통제는 될수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치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무 동떨어진 세상을 사는 사람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그들이 무엇에 좌절하고
그들이 왜 희망이 없는지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계는 대화에서 나오고 대화는 공감의 통로를 지나 영혼과 영혼의 소통으로 찾아옵니다.
교회는 영혼과 영혼의 소통이며,
교회는 마음과 마음의 이야기이며,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곳입니다.
첫째, 이 시대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입니다.
한국은 진리를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진리를 아는 천만의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앎에 대한 추구와
교회들의 복음만을 외치는 열심이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은 인생의 끝에서 만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만 외치지 인생의 끝자락,
낭떠러지 절벽에 매달린 인생은 보지 못합니다.
질그릇에 담긴 진리만 강조하다 깨지고 상한 질그릇의 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이 말이 많은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고함을 치는지 아십니까?
왜 문제를 자꾸 일으키는지 아십니까?
타는 버스비가 얼마인지,
한 달에 전기세가 얼마가 드는지
난방비는 얼마가 드는지 한 달에 아이들 과외비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는 선동은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정치적 선동과 외침일 뿐입니다.
힘들면 기도하라고 합니다 .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보라고 합니다.
그 말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를 모르고
성경을 봐야 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어려운 삶의 한자락이라도 같이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따뜻한 목사의 손,
따뜻한 커피 한잔이라도 함께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사람들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을 가지고 살아도 희망이 없어 보이고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것 같은 답답함과 함께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든 것입니다.
울분으로 가득찬 시대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 이전에
같이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학의 깊이를 자꾸만 추구하지 마십시오.
성경의 수 많은 이야기만 자꾸 들이대지 마십시오.
그 깊이 만큼, 그 지식만큼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와 삶의 현장을 이해하는
같은 눈높이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째, 출애굽의 동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이 출애굽을 결정한지 아십니까?
애굽땅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와 고통소리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23-25)
비전의 출발은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출발은 백성들의 탄식소리이고 부르짖는 소리이고 고통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시작,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비전,
가나안을 향하는 역사적 출발점은
<사람에 대한 이해>였다는 말입니다.
질그릇은 무시하고 우리는 진리만 외칩니다.
질그릇의 깨지고 상한 상처와 인생의 눈물은 외면하고
오직 신학의 정답과 비전을 가장한 야망으로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비전>의 시작은 <내 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아는 사람의 강점이 삶의 현장에서 가장 큰 약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비전이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 비전이 없어서입니까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입니까?
비전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더 많이 힘든 것 아닙니까?
사람을 살려야 하는 나라가 사람을 무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시작이 나라의 기초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비전의 시작인데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세워진 비전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이 가치 있는 것은 진리가 질그릇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그 질그릇이 나이고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삼은 감사와 감격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적용은 오직 자신에게만 합니다.
다른 사람도 질그릇이고
다른 사람도 눈물이고
다른 사람도 존귀한 자임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시각에서 교회는 자기의 야망을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장한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증거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부족입니다.
정치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의 증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그들의 정치적 슬로건을 비전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성도가 교회를 다닐수록 허전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진리를 몰라서도
복음을 몰라서도 아니라
복음을 담은 그릇이 깨지고 상한 질 그릇임을 알지 못하는
<이해의 부족>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시작>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신음입니다.
고통의 소리입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둘째, 그래서 이 시대는 자기의 소리만 내려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권념하신 이유는
<들음>입니다.
그러나 비전의 시작이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의 소리가 아닐 경우 듣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일방통행>의 시대입니다.
소리는 내는 것은 누군가 내 소리를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소리를 들어줄 여유가 없습니다.
나 하나 살기도 바빠서 다른 이의 소리를 들을 공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높아져야 하고
오직 올라가야 하고
비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와 꿈이 소리를 들을 공간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지금껏 내가 비전이라고 여겼던 그 비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전의 시작인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고함소리는 내 소리를 좀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아이입니다.
성도는 양입니다.
소리를 치는 것은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고
내 눈에 눈물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고
내 소리를 들어달라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 상처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성도도,
온 나라가 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니 서로를 들어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비전이 나올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말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나온 비전은 모두 나의 야망이지 비전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복음을 잘 안다 말하지 마십시오.
신학을 많이 배웠다고 하나님을 안다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복음,
비전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복음의 시작점인 사람으로 돌아가십시오.
진리를 몰라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담은 그릇이 깨져서 진리를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남아공은 신학적으로 세계에서 유명한 곳입니다.
유명한 신학교가 있고 오래된 복음의 역사로 신학이 발달한 곳입니다.
그런 신학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나라가
가장 악한 흑백분리 정책을 써서 온 세계의 지탄을 받았고
그 결과 지금도 흑인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 없는 곳이 되어있습니다.
신학으로는 최고의 나라에서 일어나 최악의 교회입니다.
신학이 없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의 시작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탄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일어나 결과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신학을 말하기 전에 사람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하면 좋겠습니다.
신학의 거룩함과 고상함이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면 좋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상식과 예의로 그들을 안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한다고
더 좋은 목사를 찾아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비전에 내 삶을 드리는 교회된 각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각자의 머리 위에 임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신학의 부재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의 부재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기억 해야 하는 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사람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합니다.
- 드롱콥교회 입니다.
수요예배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열리지 않은 교회 대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사지만 아직 선교를 잘 모르겠습니다.
목회는 더더욱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의 시작은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 하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복음의 한 진리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 많은 지식과 신학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