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2>
< 상처에서 나온 비전은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상처의 시작은 <비교>입니다.
시험의 시작도 비교입니다.
비교가 상처를 만들고 상처가 야망을 만듭니다.
<상처>에서 나온 <비전>은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아픔을 겪은 시대, 상처를 겪은 어린 시절,
거절당한 인격이 비전이 아니라 야망을 낳습니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속에서 나온 비전은 결국 개인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한국의 역사는 상처의 역사입니다. 나라가 그러하고 백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장 많이 외치는 사람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 외치는 비전은 비전이 아니라 비전 속에 숨긴 야망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상처 그리고 아픔과 눈물의 상처 위에 세워진 나라이고 교회입니다.
온 나라 사람이 이루고 싶은 것은 상처에서 나온 꿈입니다.
상처에서 나온 야망입니다. 지극히 가난해서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배우지 못해서 자식만큼은 배우게 하고 싶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배우는 것은 결국 상처 속에서 나온 꿈입니다.
가난의 상처와 못 배우고 거부당한 상처속에서 나온 꿈과 비전을 가장한 야망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온 교회가 그 예수를 이용해 부자가 되고 큰 사람이 되고 높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지만 정작 본심은 개인이 가진 상처를 하나님 나라를 통해 회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비교 당하고,
거절 당하고,
소외 당하고
무시 당한 그 상처를 높음이라는 야망으로 회복하고 싶은 것이 이 <시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을수록 잘 되야 하고
예수를 잘 믿을 수록 더 높아져야 하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다는 것에 더 열광하는 것입니다.
모두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의 생각-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더 높아지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를 붙들고 있습니다.
목사로부터 어린 아이까지 세상보다 더 세상 같은 비교의 한 가운데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야망에 인생을 걸고 신앙을 걸고 높아지려 합니다.
상처속에서 나온 비전은 결국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 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커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이름이 나야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본심이 되었습니다.
<상처>속에서 나온 <비전>은 결국 <야망>이 되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장한 나의 야망과 가장 죽이 잘 맞는 말은 목사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야망>과 목사의 <축복>이 만날 때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열심의 끝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야망과 축복의 기대가 만날 때 열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망을 숨긴 열심은 결국 다른 사람을 다시 상처 주게 만듭니다.
상처속에서 나온 비전은 결국 야망이 되어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모세의 열심은 다른 사람을 죽였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열심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열매를 낳습니다.
진정한 비전이 아닌 비전 속에 숨겨진 상처에서 나온 야망은
다른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열심의 칼이 됩니다.
그래서 열심으로 열매를 낳고
열심으로 높은 자리에 이르고
열심으로 뭔가를 이룬 사람의 특징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되고
자기의 이름과 높음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서 만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따릅니다.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오직 순종과 겸손으로 주의 비전을 위해 전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상처는 열심을 낳지만 회복되지 못한 상처속에서 나온 비전은
야망이 되어 세상적으로 최고를 좇다 보면 하나님과 가장 먼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자리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이 수 십년 동안이 최고를 이루었습니다.
기적을 이룬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잃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과연 세상적으로 최고가 하나님께 최고가 될 수 있을까요?
상처에서 나온 비전은 오직 올라가려 하는 야망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올라갈 수 없다면 더 낮은 곳이 답입니다.
바벨탑도 무너뜨린 하나님,
세상의 가장 강한 나라도 무너뜨린 하나님,
그 하나님의 대안은 더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에게 비전은 오직 올라가고 높아지고 더 커지는 것이 되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허무와 허전한 인생의 열매가 되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배제된 비전은 권력과 합쳐지면 괴물이 됩니다.
야망이 권력을 만나면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비전의 끝은 함께 입니다 .
그러나 야망의 끝은 홀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 함께함을 영원히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야망을 비전에 숨긴 상처의 사람들은 함께함이 아니라
홀로 잘 되기 위해 예의도 상식도 없이
오직 혼자 달려가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입니까?
그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왜 꼭 당신이 잘 되는 것으로 이루어야 합니까?
내가 꼭 높아지는 것으로만 이루려 하십니까?
예수님은,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십자가에 죽고
불에 타 죽고
목이 베어 죽고
감옥에서 처형대에서 죽었는데
우리는 왜 꼭 내가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내가 높아지고 내가 잘 되는 것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십니까?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첫 번째는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네 배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생각 두 번째는
<네 배부터 채우라> 입니다.
상처에서 비전을 가장한 야망이 나오고
그 야망의 핵심이 바로 네 배부터 채우라는 시대의 생각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의 생각,
노아 때와
바벨탑 때와
소돔과 고모라 때의 심판의 이유는 모두다 그렇게 생각하는 악입니다.
이 시대에 모든 믿는 자들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의 생각은
네 배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가 배고픔과 가난과 배우지 못함으로 거절당하고 버림받고
외면 당한 상처의 시절을 지나면서
복음이 아닌데 복음처럼 여겨지는 시대의 생각은
내 배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고
내 자식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가고
내가 먼저 높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
그것이 악입니다.
그것이 시대의 생각입니다.
모두다 그렇게 여기는 생각…
잘 갈아진 칼처럼 예리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자에게 들려진 칼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시대와 인생의 상처에서 출발한 비전이 교회를 죽이고 나라를 죽이고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은연중에 들어온,
가만히 들어온 복음을 가장한 복음 같은 생각을 도려내야 합니다.
그렇게 상처를 회복하고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어온 교회가 이 땅에서 받는 대접은
외면입니다.
거절입니다.
사회로부터 개독교라 불리고
사회로부터 가장 믿지 못하는 집단이 교회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시대입니다.
복음의 본질로,
복음의 정신으로
복음의 생각으로 돌아가야합니다.
과연 내가 높아지는 것이 영광이 될까요?
내 배를 먼저 채우는 것이 과연 복음일까요 사단의 생각일까요?
내 배를 먼저 채우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될까요?
기적을 이뤘지만 기쁨을 잃은 나라입니다
돈은 있지만 돈으로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돈을 벌면 행복하고
돈으로 내 배를 먼저 채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라 속고 살아왔습니다.
비교 속에서 낳은 상처가
다시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하면서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한 아이를 외국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보내고
아이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파는 엄마,
아이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이 사회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비전이 참 비전이라면
함께 가야합니다.
좀 덜 벌어도
좀 덜 올라가도
좀 작은 집에 작은 차를 타도
더불어 함께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성령의 방향입니다.
첫째, 상처에서 나온 열심은 사람을 죽입니다.
모세입니다.
모세는 비전을 가장해 야망을 이루려했지만
결국 야망에서 나온 열심은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다 해결이 되야합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감사합니다하고 달려가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기적도 보여주시고
함께할 자도 주시지만
모세는 거부합니다.
모세는 거절합니다.
그러자 길의 숙소에서 천사가 그를 죽이러 왔습니다.
비전을 받은 모세를 죽이려는 하나님입니다.
왜요?
모세는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서입니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에서 나온 꿈과 비전은 결국 자신도 다른 사람도 죽입니다.
다행히 모세는 지혜로운 아내가 있어서 겨우 살게 됩니다.
모세의 상처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눈입니다.
모세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께 외친 한마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모세의 과거에 받은 상처는 그의 출신이고
다른 사람이 모세를 어떻게 여기는가라는 시선입니다.
정통 왕자가 아니기에 그는 늘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쫓겨나고 광야를 산 사십년 동안도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비전을 줘도 상처가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비전이 비전이 되지 못합니다.
출애굽기 3장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자신의 상처속에서 나온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
천사에게 죽음의 고비를 넘깁니다.
모세가 결국 지팡이를 두번친 것은 상처를 넘지 못해서입니다.
모세가 넘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상처속에서 내 비전을 이루려 하지만
결국 그 상처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룬 꿈은 나를 괴물로 만듭니다.
야망과 힘이 만나면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의 상처와 거절의 상처에서 자란 나의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아니라 나의 야망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내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는 비전을 제발 내려 놓으십시오.
상처가 회복되기 전까지 가지는 모든 열심은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한국은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걸리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머리끝까지 화를 안고
분노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화와 분을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교회에 쏟아내고
목사에게 쏟아내고
가정에서 쏟아 냅니다.
상처는 상처를 낳고
상처 받은 부모는 상처 받은 자녀를 만들어 냅니다.
상처 회복이 되어야 할 교회가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비전을 외치고
예수를 믿으면 잘 된다는 꿈을 주었는데
막상 살아보면 잘 살고 돈 많이 벌고 잘 된다는 꿈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분노와 화를 교회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나마 소위 축복을 받고
잘 사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상처의 회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잘못된 높아짐의 비전이 결국 그 비전을 제시한 교회와 목사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 상처의 진정한 회복은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믿음은 세상의 끝에서 만난 유일한 하나님의 빛입니다.
왜요?
이 세상은 하나님처럼 되려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목표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을 채워도 비교로 시작된 세상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려는 세상에 하나님 자신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비교의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낸 유일한 목적입니다.
성령을 보낸 이유입니다.
우리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말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입니다.
<처럼>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처럼 되어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하나님을 만나면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왜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는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악하자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났다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님이 오셔야 하는가?
성령이 오셔야 흙이던 사람이 영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천년 이 천년 살아서 나를 믿으면 죽지 않는다 말하면 더 잘 믿겠지만
우리가 잃은 것은 영원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영원은 오직 성령의 임재 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호흡으로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교할 대상에 세상이 없어집니다.
믿음의 시작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소유한 우리가 여전히 세상 것에 비교 당하고
세상 것에 높아짐의 상징인
바벨탑의 높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내 안에 영원이 없고
영원의 감각이 없다는 증명입니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것은 내 안에 세상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고
영원을 소유했다는 증거입니다.
왜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 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순절 다락방에 임하고 나서 변했습니까?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영원을 내 안에 가졌다는 영원에 대한 앎과 감각이었습니다.
누가 세상과 반대로 갑니까?
영원을 소유한 사람만 반대로 갑니다.
누가 세상의 악한 생각으로 떠난 영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세상의 끝에서 만난 믿음,
그 믿음으로 영원을 산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 비교하지 않고
상처에서 회복되어
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내 전부를 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 모세가 이 상처를 회복하게 됩니까?
홍해를 건널 때 입니다.
그의 노래가 달라집니다.
영원히 죽은 자가 생명을 얻는 순간 그의 상처가 회복되었습니다.
셋째, 상처는 영원이 내 안에 거할 때 회복됩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내 안에 인식될 때 우리는 세상이 비교하는 비교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입니다.
우리는 그 비교의 무기에 상처받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언제 그 상처가 회복됩니까?
비교할 것 없는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흙이 영생이 되는 호흡으로 그분의 생기가 내 안에 거하며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로 내 자신이 인식될 때 우리는 상처의 사람이 아니라
회복의 사람으로 내 죽음도 두렵지 않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계집종도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가
온 세상의 칼과 창과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지식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는 영원의 절대적 앎이 존재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호흡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영원으로 거하시며
여러분이 영원의 존재로 세상이 비교할 것 없는 존재다 되었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시대의 생각에 묶여 살지 않기 바랍니다.
나누고
베풀고
섬기고
낮아지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영원>입니다
<상처>에서 나온 <비전>은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여러분의 비전이 상처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의 호흡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의 비전을 가장한 야망입니까
아니면 영원의 호흡이신 성령의 이끄심입니까?
모세가 신었던 신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상처의 자존심입니다.
우리의 꿈이 혹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모세의 자존심의 신은 아닙니까?
영원으로 회복되지 못한 호흡에서 나온 모든 숨은
내 인생에 이루고 싶은 바벨탑의 높음이며 그것을 위한 또 다른 상처입니다.
당신의 호흡 속에 영원이 있습니까?
그 호흡으로 시대의 생각이 아닌 시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들숨>,
<날숨>이 되기를 바랍니다.
- 교회가 은혜가 깊어지니 계속해서 귀신들이 나오고 쫓겨납니다.
말씀이 깊어지고 찬양과 간증이 깊어지니
몇주 계속 영적인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여기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귀신들이 드러납니다.
아직 영적으로 깊지 못하니 귀신들도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들어납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어떻게 영적으로 일할까요?
<생각>입니다.
보편화된 생각!
에덴동산에서 넣었던 그 비교의 생각,
모두 자연스럽게 여기는 그 생각의 또아리속에 영원의 호흡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통해 상처의 재생산을 만들고 그 상처를 통해 비전이 아니라 야망을 이루고
자신의 바벨탑을 만들라합니다.
그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평생 선악과를 따먹고
평생 영원의 호흡을 하지 못합니다.
시대의 생각을 바꾸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