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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 <신앙으로 포장된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 <신앙으로 포장된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

 

 

 

 

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

<신앙으로 포장된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

 

비전이 야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예의와 상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자존심의 꽃을 내려 놓아야 인격의 열매를 맺습니다.

 

모세가 벗은 것은 신이 아니라

개인의 야망이라는 자존심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비전과 야망을 혼돈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래서 비전을 빙자한 야망으로 교회가 비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

야망을 이루었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사회가 아니라 교회가 먼저였습니다.

믿음과 신앙이 포장되어 있을 때는 예의 없음과 상식없음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신앙이 무너지자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믿음과 신앙이 없다는 것은

오직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진 야망이 개인의 삶과 교회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껍질이 한계를 보이자 속의 본질인 예의 없음과 상식없음으로 사람들이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입니다.

비전으로 포장을 때는 그나마 예의와 상식 없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전을 포장한 야망의 실체였던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자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고 야단을 칩니다.

비전이라고 외치던 야망이 위협을 받자 비전의 실체인 예수님도 호통을 칩니다.

 

정작 예수님이 군사들에게 잡히자

그는 칼을 뽑아 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야망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줄 마지막 희망의 자존심이라는 말입니다.

야망의 실체가 무너지자 그는 칼이라는 예의 없음과 상식- 평화를 외치며 원수를 사랑하며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내어 놓으라는 그분의 상식-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의 껍질로 자신의 자존심인 야망을 포장하고 있었는데

야망의 실체가 무너지고 예의 없음과 상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첫째, 모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신앙으로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전이라 외치는 꿈속에 자신의 나라와 왕국이라는 야망을 숨겨놓았습니다.

야망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을 쳐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벗으라고 것은

비전을 가장한 자신의 야망,

신앙을 가장한 자신의 자존심을 벗으라고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봅니다.

비전을 가장해 야망을 이루려는 교회를 봅니다.

비전을 가장한 야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신앙이라는 껍질을 벗기니 모두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예의라도 있어야 합니다.

예의가 없으면 상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신앙도 바닥이 나고

예의도 없고 상식도 없으니

이제는 <의리> 대세를 이룹니다.

 

맞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예의라도 있고 예의가 없으면 상식이라도 있고

상식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의리도 없는 세상, 의라도 없는 교회입니다.

 

신앙이라는 ,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 앞에서 만난 마지막 빛입니다.

하나님이 답이 없는 세상에 주신 마지막 빛이 믿음입니다.

 

 

한국은,

한국 교회는

숨겨진 야망을 이루기 위해 지난 세월을 달렸습니다.

그러다 예수라는 야망을 숨길 있는 비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루어보고

그래서 부자도 되어보고

그래서 자식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도 보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허무한 인생의 바닥을 느낍니다.

채울수 없는 허전함으로 하늘을 쳐다 봅니다.

 

살면

야망을 이루면 행복할줄 알았는데

더더욱 허무한 인생 앞에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해

등산복을 입고

커피를 찾고

자전거를 타고

캠핑 도구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인생의 ,

인생의 마지막 한계 앞에서 진실로 발견한 복음,

믿음이 아니면 평생 그렇게 채우지 못할 등산복과 커피와 자전거와 캠핑 도구로 인생을 채우려 것입니다.

 

 

글을 다시 쓰면서 처음으로 올린 글이

<사람을 바꾸면 시대가 바뀝니까?> 입니다.

 

비전을 야망으로 포장한 사람 백명을 세운들

<생각> 바뀌지 않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자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예의와 상식을 팔아버린 사람을 세운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까?

 

<> 아니라 <자존심> 벗어야 합니다.

<비전> 아니라 <야망>이라 솔직해 고백해야 합니다.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아십니까?

비전은 함께 가지만 야망은 혼자만 남아서입니다.

 

믿음, 신앙, 비전이라는 증명은 오직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생활하는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비전,

믿음,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바램이고

믿음이 아니라 꿈이며

비전이 아니라 야망입니다.

 

 

교회를 만들지 말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성도들은 목사를 향해 좋은 교회를 만들어라 합니다.

돈을 주고 월급쟁이로 담임목사를 데려옵니다.

성도가 정한 목표와 방향을 정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담임목사에게 이루라 말합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목사는 쫓겨납니다.

왜요?

자신이 정한 비전을 빙자한 야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도만 아닙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목사 모두입니다.

 

 

하나님이 시대를 심판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 이고

바벨탑이고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한 때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입니다.

번째 글을 <사람을 바꾸면 시대가 바뀝니까?> 이유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생각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홍수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십니다.

 

천국에서 허락되지 않는 유일한 한가지는 생각입니다.

악한 생각입니다.

 

악의 시작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사단이라는 뱀이 어떤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을 조금 바꾸었을 뿐입니다.

생각의 변화는 <비교>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비교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오직 생각이 악을 낳고

생각이 에덴동산을 망하게 하고

생각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롯유다 입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판것은 어떤 힘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단이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 넣은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나라를 심판하고

교회를 심판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교회가

나라가

사람들이 한결같이 생각하는 시대의 생각 때문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소돔에서 의인 열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도성에는 의인 열명이 없었습니다.

의인 열명이 없었다는 말은 예의와 상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 열명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의와 상식> 없었다는 말입니다.

 

 

셋째, 바벨탑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왜요?

<높아짐>입니다.

높이 올라감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감으로 사단이 처음 에덴동산에서 불어 넣었던

하나님과 같이 됨의 증명이 바로 세상에서 <높아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

열명도 생각지 못하는 생각,

세상을 심판하게 만들 생각,

생각은 바로 높아짐입니다.

소위 우리가 신앙이라는 것에 숨겨놓고

비전이라는 것에 숨겨놓은 포기 하지 못하는 자존심!!!

바로 <높아짐>입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데리고 곳은

가이샤랴 빌립보 입니다.

황제의 도시,

세상적으로이상 높이질 곳이 없는 ,

누구나 꿈꾸고

누구나 바라고

누구나 이루고 싶고 살고 싶고

그렇게 되고 싶은 황제의 도시!

 

바로 곳에서 신앙의 고백을 묻습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높아짐의 최고의 정점에서 고백하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높음을 향한 생각을 포기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황제의 도시를 꿈꾸는 비전을 가장한 야망을 포기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껍데기에 감추인 예의 없음과 상식 없음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

생각에 우리는 지금껏 속고 속이고 스스로 속아서

지금도 교회는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교인들도 매주 예배를 드리며 허전한 인생에 눈물을 흘리고

어쩔 없이 교회를 다니는 신앙이 것은 아닙니까?

 

 

교회가 지금껏 예수를 믿고 높아지는 바벨탑을 향하고

목사들의 설교가 지금껏 황제의 도시의 높아짐을 가르키고

세상보다 사는 것에 목소리를 높인 결과가

가장 가까운 사람도

가장 가까운 이웃도 인정하지 못하는 성도

가장 가까운 성도도 인정하지 못하는 목사가 것은 아닙니까?

 

 

믿음은 세상의 끝에 열어놓은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대안을 다시 세상에서 황제의 도시를 만들려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높아지고 살려는 사탄이 심어놓은 비교라는 생각에

인생 전부를,

신앙 전부를,

믿음의 전부인 것처럼 여리고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이,

모든 시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길…

바벨탑이고

소돔이고

가이샤라 빌립보인데

 

시대는 지금 신앙을 빙자해 야망을 이루라고 부추기고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길을 가라 외치며

앞선 곳에 교회와 목사가 있습니다.

 

 

결과는 외침에 길들여진 성도들이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높아짐을 가르키던 목사를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비방과 욕과 상처를 쏟아 내고 있습니다.

 

세상보다 먼저 욕을 먹고

세상보다 먼저 무너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요?

비전을 가장한 야망,

신앙의 껍질로 포장한 예의 없음과 상식이 교회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해야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

가장 가까운 장로 집사 성도가 나의 변화를 먼저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같은 목사가 인정하지 목사는 목사,

같은 선교사가 인정하지 못하는 선교사

같은 장로가 인정하지 못하는 장로 권사 집사는

비전을 가장한 야망으로 살아간다는 가장 간단한 증명 방법입니다.

 

 

한국 교회는 신학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사학위가 없어서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짐의 원리로 신앙을 가장한 꿈과 야망이 다른 바벨탑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학이 아니라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이 아니라 예의를 배워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상식을 배워야 합니다.

 

비전을 가장한 야망을 이루느라

한국교회는 예의 상식을 버렸습니다.

야망이 한계를 보이자 예의와 상식 없음이 드러납니다.

 

시대가 예의도 없고 상식도 없으니

이제는 세상이 먼저 의리라도 지키라고 <으리~>라고 외칩니다.

 

박사학위와

신학과

꿈이

비전으로 포장된 개인의 <야망> 합쳐질 교회는 <괴물>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단의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나 없이,

의인 열명도 찾지 못한 생각이 시대에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에덴동산에서 불어 넣었던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을 찾아 바꾸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여전히 괴물이 것입니다.

시대는 여전히 등산복을 입고 커피를 찾고

자전거를 타고 등산장비를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예의와 상식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비전이 야망이 아님을

신앙과 믿음이 개인의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이 버린 황제의 도시를 향하는 인생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똑같이 노아의 홍수가 되고

바벨탑이 되고

소돔과 고모라가 됩니다.

 

시대의 생각을 읽고 시대를 거슬러가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믿음이라는 것을 이용해 다시 세상을 주워 담으려 합니다.

 

시대가 눈물입니다.

자기의 자존심의 신을 벗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방황입니다.

 

신앙과 신학의 깊이 만큼 회복되어야 것은

비전이라는 것에 숨긴 야망이 아니라

<예의와 상식>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