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같은 말은 <버림>입니다. (눅8:1- 21)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사람들에게 하십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왜 비유로 하시냐고 하니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좋은 밭이 어떤 밭입니까?
좋은 받은 듣고 <깨닫는 밭>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친히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 못 알아 듣는데,
제자들도 못 알아 듣는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못 알아 듣고 깨닫는 자는 좋은 밭이 된다고 하십니다.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오늘 8장이 시작되는 첫절부터 불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는데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다고 하십니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미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유로 말씀하지만 함께한 사람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주십니다.
왜요?
왜 이런 불공평의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누구는 같이 들어도 모르고 누구는 몰라도 풀어주십니까?
이유는 군중과 제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일부러 깨닫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군중은 가지기 위해 시작한 인생이고
제자는 버리고 시작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 말씀에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전부를 버리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똑 같이 비유를 듣지만 가지기 위해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알지 못하게 합니다.
누구에게 알게 하십니까?
간단한 부름에 자신의 전부를 버리고 따른 사람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가지 않고
예수님의 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알지 못하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상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오신 예수님이 모두와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나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아무나 깨닫지 못하게하고
말씀을 아무에게나 설명해 주지도 않으십니까?
함께 하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셨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것을 버리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에게만
깨닫는 축복을 주십니다.
좋은 밭은 다른 밭이 아닙니다.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누가 깨닫습니까?
예수님이 비유를 풀어주셔야 깨닫습니다.
삶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풀어주셔야 깨닫습니다.
그럼 누가 깨닫습니까?
말씀을 듣고 자기의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에게만 비유를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좋은 밭을 가지기 원하는 사람은
삶의 눈물과 아픔을 통해 다 버리고 주를 따르는 상태와 환경을 만드십니다.
고기를 잡지 못하는 실패와
남편과 자식과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통해서
예수님 밖에 없음을 삶으로 깨닫고
자신의 것을 전부 버리고 따르는 겸손을 허락하십니다.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자는 말씀에 다 버리고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누가 어머니이고 동생인지 말씀으로 정의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어머니고 동생이냐는 정의를 그렇게 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21)
그리고 씨뿌리는 비유도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 깨닫습니까?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15)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가지기 위함이 전제가 아니라
버림이 전제입니다.
다 버리고 따른 사람들이 좋은 밭이고
깨닫는 자이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같이 말씀을 듣지만 깨닫는 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버리고 따른 자들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를 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가짐을 전제하지 않고
<버림>을 전제합니다.
가지기 위해 따른 자들인 무리와 군중은 평생 따라다녀도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깨달으려 해도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버림>이 없는 인생은 평생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됩니다.
깨닫지 못하면 평생 좋은 밭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내 지분을 버려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얻는 내 누림을 버려야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몫 잡으려는 인기와 권세와 권력과 버려야합니다.
함께 욕도 먹고
함께 배도 고프고
함께 핍박도 당하고
함께 가난함에도 거하고
편안함도 버려야합니다.
그 <버림>이 전제 될 때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거저먹고
천국도 거저먹고
예수님 때문에 좋은 것은 다 거저 먹으려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함께 하신 비유는 등불비유입니다.
등불을 평상 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숨겨진 것이 다 알려지고 다 드러나고 다 밝혀 진다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 가지기 위해 사는 인생이 다 밝혀집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인생이니
가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지만 버림이 없는 가짐의 방향과 목표는
결국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것들을 버리고 귀하게 시작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긍휼로 내가 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버렸던 수 십배 수 백배의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보상으로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그 보상을 어떻게 다시 버리느냐가 <천국>을 결정합니다.
시작할 때 버렸던 믿음보다
처음 예수를 믿고 <버림>에 대한 보상으로 주신 그 보상을
다시 버릴 수 있느냐가 진짜 내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첫 버림>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첫 버림의 보상을 <다시 버림>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십니다.
첫 버림으로,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린 그 첫 버림의 보상으로
예수님으로 인한 수 많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첫버림의 보상이 그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높아지려하고
더 잡으려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를 만나기 전의 인생의 실패를 허락하십니다.
주님 앞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주님을 부인하는 그것도 세번을 부인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십니다.
깨닫는 은혜는 버림 뿐만 아니라
나의 실패와 나의 부끄러움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첫버림>을 드린 자들의 <축복>입니다.
버림이 없는 축복은 저주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깨닫지 못함은 저주입니다.
비록 누추한 삶이어도 하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버림으로 주어진 <축복>입니다.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버린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택된 자들의 축복입니다.
평생 알고 싶어도 깨닫고 싶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아는 우리입니다.
그 깨달음을 아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버림의 대가로 얻은 깨달음에
행하고 지키는 수고가 남았습니다.
부르셨으니 버리고
버렸으니 행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버렸습니까?
무엇을 행하고 지키십니까?
평생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이고
열매를 맺는 이유이고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이유입니다.
높아지고 가져도 하늘의 비밀과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버린자와 버리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깨닫기 원하십니까?
버리십시오.
<깨달음>과 같은 말은 <버림>입니다.
* 선교사로 파송 받고 2개월 만에 오기스교회에서 첫 설교를 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가족도 버렸었습니다.
친구도 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약 30년이 지났습니다.
버린 것보다 누리는 것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버렸던 그 가치보다
더 좋은 집과 차와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집은 월세고 차는 4년 된 중고차고 집안에 가구는
오래되고 남들 쓰다 버린 것에 옷들도 흑인들 가져다 주라는 옷 중에 골라 입지만
내가 버린 그 버림보다 더 나은 보상과 가치와 축복임을 알기에
누리는 것이 언젠가부터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교회,
목사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과 성도들,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내가 누리는 이 누림이 <부끄러움>입니다.
<수치>입니다.
평범한 집에 평범한 차에 평범한 옷을 입고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첫 버림으로 누리는 보상에 취해
다시 버려야 하는 버림의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지려 했기에
더 잡으려 했기에
예수를 팔았던 베드로입니다.
그 베드로가 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아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부끄러움>은 <회복>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시 버려야 합니다.
다시 아버지와 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주시는 깨달음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밭>이 되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버렸느냐>로 결정이 됩니다.
버리지 않고 말하는 모든 것은 깨닫지 못하는 <실패의 인생>입니다.
다시 내가 <누리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회복하고 교회가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원리입니다.
처음 버렸을 때,
처음 가졌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 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가 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