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is better" (눅5:12-39)
병이나 인생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해결하려고 오신 <죄>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5장에는 네 가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첫째는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를 부르시는 사건과
둘째 셋째는 나병 걸린 사람을 고친 것과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지붕을 뜯어 내려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 세리 마태를 부르신 내용입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베드로의 고민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이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도록 말들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자신의 병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친구의 병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했습니다.
모두다 인생의 문제로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만든 이유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병, 인생의 막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도 물고기도 잡고 부자가 되고
그래서 병도 낫고 나음도 얻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죄>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고기 문제로 대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의 고민은 물고기 즉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다른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그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그것을 고백해서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8)
물고기가 두 배에 가득 차서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적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베드로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 죄을 인식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너무 죄가 커서 주님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고백, 그 상태를 인식한 것입니다.
죄를 고백한 사람,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아는 사람을 주님을 부르십니다.
셋째, 병 고침보다 중요한 것은 죄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늘 자기의 병,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중풍병을 고치러 나온 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이십니다.
병보다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
병을 아무리 고쳐도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무의미 합니다.
사람은 병을 고치고
물고기 잡는 문제가 해결이 되어도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15)
사람들이 예수님께 왜 오시는 예수님은 아십니다.
병도 고치고 말씀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마음이 즐겁고
병이 나아 기적을 경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군중들,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알리고 싶은 것은
인자가 왜 왔느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평생 더 잘 살고 병을 고치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추구하다 평생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부러 네 죄 사람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논란이 되고 말썽의 이유가 될 줄 알면서도 주님은 죄를 사한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병만 고치고
부자가 되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죄인이라는 고백 위에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중풍병자를 병만 고친것이 아니라
죄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 죄의 해결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갔다 기록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 후에'라고 27절을 기록합니다.
바로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그 후에'라는 말을 기록하는 이유는
앞의 사건과 연관되는 사건을 설명할 때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바로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세리입니다. 세리 마태를 말합니다.
그를 부르시고 곧 온 세상 사람들이 욕하는 세리와 친구들이 잔치를 합니다.
죄인들의 잔치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미워하는 죄인들이 집단으로 잔치를 합니다.
그 한 가운데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어김없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방을 합니다.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한마디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
왜 베드로를 부르십니까?
왜 중풍병자를 고치고
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잔치를 하십니까?
그들은 죄의 문제로 평생을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로 인생의 깊은 시름을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병이 아니라
물고기를 더 잡느나 안잡느냐의 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날마다 죄의 문제로 고민한 인생,
내가 죄인임을 뼈 속 깊이 고민한 인생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인을 구해야 하는데 어찌 의인의 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인들과 함께 해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유를 하십니다 .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둘다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결론은 옛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십니다.
<묵은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새것을 원하고
사람은 의인을 원하고
사람은 뭔가 좋은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인생이 더 나아지는 것을 원하지만
주님은 낡은 것,
묵은 것,
오래된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은 나는 죄인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온 사람이 죄인이 좋다는 말씀을 그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왜 죄인들과 먹고 마시냐고 하자
주님이 하신 비유가 포도주 가죽부대 말씀입니다.
섞이지 않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나 생각,
내가 죄인을 부르러 온 내 마음이 섞이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낡은 것,
묵은 것이라 여기는 죄인들과 내가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새것에 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 것이 있어도
좋은 것이 있어도
의인이 있어도
나는 묵은 것,
낡은 것,
세상이 버린 죄인을 찾고 부르겠다는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새 사람이 되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주님을 만나고 얼굴을 대할 자신이 없어 나를 떠나라고 고백할 만큼의
죄의 인식과 죄의 추함을 아는 사람이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주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삼으십니다.
중풍병자도 나병환자도 세리 레위도
함께한 사람들과도 먹고 마신 주님의 마음은
인간이 늘 새로운 것에 속고
인간이 늘 더 나은 것에 속고
인간이 늘 더 깨끗하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에 속을 때
주님은 묵은 것이 좋다.
낡은 것이 좋다.
세상은 새것을 원하고
세련되고
교양 있고
멋있어 보이는 인생을 구하지만
나는 낡고 묵은 포도주가 더 좋으니
그렇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주님의 자기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수준이 있어지고
사람들이 교육수준과 사회적으로 발전을 하면서
낡고 묵은 것은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양 있고 의식 있고 뭔가 나은 인생들만 만나고 환영하고 축복하는 곳으로 갑니다.
새 가죽부대입니다.
낡은 사람들,
묵은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낡은 것이 좋다는데
주님은 묵은 것이 좋다는데
우리는 자꾸 새것을 원하고 고급을 원하고 세련되고 멋진 인생만 환영합니다.
우리가 함께 할 사람들이
낡고 묵은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새포도주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본능은 늘 새것을 원합니다.
내가 낡고 묵은 것이니 나는 낡고 묵은 사람이 아니라
새것을 원하는 인생을 꿈꿉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낡은 것,
묵은 것,
그것이 더 좋다는 말씀이 자꾸 내 인생에 남습니다.
내 인생이 낡고 묵은 죄인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The old is better."(39)
그런 나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
그래서 그분은 나의 주님입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를 다니셨고 지금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계시는
유현성집사님께서 미용 마스크 팩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선교팀이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선물로 드렸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시는 성도들을 위해 정은혜사모님이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평생 한번 사용해 보지 않은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이니 다들 웃음이 함박입니다.
무식하고,
어리석고,
세련되지도
인생이 고급스럽지도
가까이하면 냄새도 나고
생활의 수준도 형편 없는 그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들을 부르러 오신 주님인 것을!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주님인 것을!
스스로 의인이라
스스로 의롭다
스스로 자랑하고
더 높은 것에만 마음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면 눈물 흘리고
함께하면 웃음을 선사하는
그들을 위해 오신 주님을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형편이 나아지고
생활의 수준이 높아지고
집도 차도 옷도 지위도 좋아지니
자꾸 이들이 잊혀지는 인생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자꾸 높은 인생,
자꾸 더 나은 형편,
자꾸 물고기를 더 잡는 인생만 꿈꾸다
정작 나는 죄인임을 잊어 버리고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저들의 한 가운데 임을 잊어버리지는 않는지
오늘도 고민합니다.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늘 이 땅에 산다면
분명 저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다고 믿습니다.
낡고 묵은 인생을 부르시고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주님!
우리의 인생 늘 새것,
새 포도주,
물고기만 바라고 달리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오신 목적!
<낡고 묵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