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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적 울타리를 넘어야합니다.

관계적 울타리를 넘어야합니다.

 

 

 

 

 

 

 

 

 

관계적 울타리를 넘어야합니다.  (눅4:14-30)

 

평생 성령의 능력을 구합니다.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간구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가고자 하는 길과 다른 길을 갑니다.

 

사십일 금식과 시험을 이기신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 전역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오해를 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기가 막히게 풀어주는 예수님을 보고

뭔가 다른 기대감과 시대를 바꾸어줄 실력과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다른 목회, 뭔가 다른 신학, 뭔가 다른 능력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성경을 일부러 찾아 읽으신 본문은

이사야서입니다. 61 1절입니다. 일부러 찾아서 읽으셨다고 하십니다. (4;17)

 

내용은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기록한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능력을 보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사회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

정권을 바꾸고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받으시고 세상으로 나오신 성령의 능력을 입으신 주님에게

세상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토대로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입은 자들이 해야할 일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자기 선언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선언>이란 말입니다.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사람이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학벌이나

기술이나 경력이나 힘을 가지면 뭔가 자기를 증명해 보고 싶어합니다.

 

더욱이 자기를 아는 고향 사람들,

자기의 사정을 너무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선언을 곳은 고향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에서 자기 선언을 했을까요?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곳입니다.

 

시험도 통과하고

성령도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리고

소리도 들었습니다.

확신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지금까지 보여주던 예수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에서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어떤 삶을 것인지

어떤 사역을 것인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눈먼 자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나고 찾아가고 보냄을 받은 사람은

<가난한 자들>이고

<포로된 자들>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이고

<눌린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힘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힘을 가지면 본능적으로 나은 자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자기를 증명하는 것을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로 증명하려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수준이 있고

부자들이고

이름이 있고 유명한 자들임을 증명함으로

자신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그런 자들에게 가지 않습니다.

그저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과 눌린 자들에게 간다고

<자기 선언>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요?

누구의 요구 앞에서요?

고향 사람들 앞에서 말입니다.

 

가장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 ,

자기가 누구였는지 보여주고 싶은 갈등이 강한 곳인 고향에서 그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증명하는 어떤 일도 그곳에서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보냄을 받은 사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고향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행한 일을 여기서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고향에서,

자기를 너무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누구 집의 아들,

누구의 ,

누구의 친척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봐오던 사람,

알던 사람,

너무 오래 함께한 목사,

너무 오래 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사람의 역사 성장 배경과 인격과 삶이 생각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마음보다

내가 알아오던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를 못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랬동안 섬겨오는 담임목사님을 통해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오랫동안 알아오던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까?

예수님이 문제입니까 고향 사람들의 시각이 문제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사람들의

<관계의 울타리> 문제입니다.

 

 

내가 너무 알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슨 사람에게 선한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의 울타리,

<관계의 울타리> 믿음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를 것은 엘리야와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듭니다.

이스라엘에게 엘리야가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냄을 받았고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관계의 울타리고 제한하는 나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울타리에 묶여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목사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사를 관계의 울타리 안에 묶어 놓은 나의 생각이 문제일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제한 하는 우리의 관계적 울타리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대할 우리는 나의 관계적 울타리로 제한을 합니다.

하나님은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다만 내가 제한하면 다른 곳으로 역사를 옮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내가 너무 아는 목사님

내가 너무 오래 섬겨온 목사님이기에 기대하지 않고

그저 내가 알아온 고향의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관계의 울타리로 말씀도 능력도 예수님의 일하심도 제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낭떠러지로 끌려가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피해 가십니다.

피하는 것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관계적 울타리를 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한다면

관계적 울타리에 갇히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친척,

가족이 목회자로둔 사람이 가장 은혜 받기 힘듭니다.

목회자가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기기 가장 힘듭니다.

이유는 내가 사람의 삶을 알고

사람의 과거를 알기 때문입니다.

 

관계적 울타리에 갇혀서입니다.

관계적 울타리 때문에 나사렛은 평생 나사렛이 됩니다.

선한 것이 없는,

기적을 없는 곳이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을 나의 관계적 울타리로 제한 해서는 안됩니다.

담임목사님을,

오랫동안 알아오던 가까운 목회자를

그저 내가 아는 사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서 보고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나사렛에서는 쫓겨난 예수님이

다음 주에 가버나움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베푸십니다.

 

동일한 예수님!

동일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관계적 울타리에 인생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없고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제한 해서 말씀도 들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관계적 울타리> 넘는 축복이

우리의 삶에 있기를 기대합니다.

 

 

 

 * 남천교회 선교지 방문팀이 오셨습니다.

의료팀과 동부사노회 섭외부 목사님들이 오셨습니다.

 

아는 분들을 만나고 가족 같은 분들을 만난 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부담입니다.

가장 가까운 분들에게 인간적으로 보는 누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실패한 고향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다는 !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축복이며 감사이고 감격입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않는 저이기를 기도합니다.

 

마다 않고 달려오신

고신대학교 의료팀과 남천교회 선교팀 그리고 동부산 노회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