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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림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입니다.

누림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입니다.

 

 

 

 

 

 

 

 

누림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입니다. (눅4:1-13)

 

세상은 얼마나 <누리느냐> 접근합니다.

내가 그러나 얼마나 <누리느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누구를 <섬기느냐> 문제입니다.

 

 

<가장 힘든 유혹>

 

사람에게 가장 힘든 유혹은 배고픔에 관련된 유혹이고

둘째는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유혹이고

셋째는 보이는 유혹입니다.

 

오늘 마귀는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권위와 영광을 가지라합니다.

 

사람은 보고 나면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하만국을 가진자가 권위와 영광을 있다고합니다.

금방 가질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보는 것에 약합니다.

보면 가지고 싶어서 모든 대가를 지불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찾아 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일단 보여줍니다.

사람이 보지 않으면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권위와 자리의 영광을 보면 가지고 싶습니다.

보고나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몇배나 강하게 찾아옵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할 일단 보여줍니다.

보기에 좋고 권력과 권위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에 세상이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누림입니다.

얼마나 누리느냐가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러나 누림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누리라합니다.

말에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합니다.

 

세상은 누리라하고

예수님은 섬기라합니다.

그래서 <섬김> 반대는 <누림>입니다.

 

많이 사람,

세상의 영광과 자리의 권세를 맛본 사람은

섬기지 못합니다.

섬김의 반대는 누림이어서 그렇습니다.

 

누림이 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사람을 섬기는 일은 멀어집니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자리 차지하고 시간이 가면 어김없이 섬기는 일과 멀어집니다.

사람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섬기지 못합니다.

 

자기가 누리는 자리에 있어서입니다.

섬기지 않느냐라고 물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결국은 누림 안에 갇혀서입니다.

 

한번 누리는 자리에 앉으면 섬기는 일은 자꾸 멀어집니다.

그래서 편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자리는

나를 섬기는 자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좋은 ,

세상의 화려한 ,

세상의 권위와 영광을 보고 맛본 사람은

오직 그것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한번 보면 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것을 맛보고도 누구를 섬길지 결단하고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 머물지 마십시오.

너무 세상의 좋은 것을 오래 보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뭔가 얻으려고 화려한 세상을 자꾸 보지 마십시오.

 

인생은 누구를 섬기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누리지 않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영광과 권위를 누리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세상은 누림을 위해 한가지만 하라고 합니다.

주겠다고 합니다.

한가지는 마귀에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학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간단히 내가 누리기 위해 섬기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는 것은

내가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가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섬기는 >

<포기>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내가 누림을 포기 한다는 것입니다.

없이 많은 세상의 권위와 영광의 누림을 포기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섬기기를 포기합니다.

예배도 포기하고

헌금도 포기하고

시간을 드림도 포기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의 누림을 포기하고 섬기기를 택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것을 누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를 택합니다.

사람을 섬기기를 선택합니다.

 

절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저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리기 위해 섬기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림> 반대는 <섬김>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누리는 사람으로 만들려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누리는 사람으로 키우려합니다.

공부는 잘하고

좋은 학교를 나오고

그래서 좋은 직장을 갔는데

마귀에게 절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누리려 합니다.

아니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누리려 합니다.

절하는 인생입니다.

세상에게 절하고

마귀에게 절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있는 곳은 <>이라고 합니다.

<>하는 곳이 <>입니다.

누리기 위한 곳입니다.

세상의 것을 누리기 위해 빌고 절하는 곳이 절이 되었습니다.

 

섬김은 없고 오직 누리기 위한 절입니다.

교회가 절처럼 되었습니다.

섬기기 위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누리기 위해서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절하고

마귀에게 절해서 많이 내가 누리기 위해 사는 곳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누리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거절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세상의 왕이 안되었다고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에 절하지 않음은

누리지 않고 섬기는 인생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누리기 위해 사는 인생들로만 가득한 교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누리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섬겨야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데

섬기지 않고 내가 누리려하니 세상에 절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누림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누리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에 있습니다.

 

 

비밀이 믿는 우리의 비밀이 되어야합니다.

섬겨도 누리는 축복!

그것이 <> <교회> 다른 이유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절에 다니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교회를 다니면서 천하만국의 누림을 거절한 예수님처럼

오직 섬기는 인생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문제!

누림이 아니라 섬김의 문제입니다.

 

 

 

 누리기 위해 사는 인생은 아무리 화려해도

철조망에 갇힌 인생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달려가 보지만

누리기 위한 인생은 갇힌 인생입니다.

 

집을 잃은 아저씨의 인생을 노래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와 같습니다.

누리기 위한 인생은 허무입니다.

 

섬기기 위한 인생은 자유와 평안 가운데 거합니다.

 

섬김을 다한 예수님이 부활하고 후에 하신 마디는

<평안>입니다.

 

누림의 인생은 평안이 없고

섬김의 인생은 평안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