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아십니까? (눅3:21-38)
세례는 육신이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신이 죽었다는 것은 죄로 살던 삶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내가 죽었다는 것이 삶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하던 내용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의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육신으로 살던,
죄로 살던 삶의 변화입니다.
세례 요한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보여줍니다.
죄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죄에 대하여 죽는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 것입니까?
첫째, 나누는 삶입니다.
죄의 시작은 나누지 않고 <차지함>입니다.
오직 가지기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과 세상에 예수님은 오직
나누기 위해 사는 인생으로 살겠다는 고백이 <세례>입니다.
죄에 대하여 주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에게 말씀이 임하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이는 '내 기뻐하는 자',
'내 사랑하는 자'라고 소리가 났습니다.
뭐가 기뻐하고
뭐가 사랑하는 아들입니까?
<세례를 받는 자>입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 다는 것이 세례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간단합니다.
<나누는 삶> 입니다.
나누지 않는 모든 것은 다른 종교와 같습니다.
어둠의 시대는 나누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영적 어둠은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시대입니다.
첫번째 마귀의 시험은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의 반대는
<채움> 입니다.
인류의 죄는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자기 배를 채우고
남아도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기뻐하는 자라고 사랑하는 자라고
소리가 들린 것은
자기 배만 불린 인생이
자기 배가 곯아도 다른 이의 인생을 채우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그저 주를 위해 살겠다는 뜬구름 잡는 각오가 아니어야합니다.
세례는 회개하러 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를 요구한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들어야합니다.
나누지 못하는 인생에서 나누는 인생으로 돌아서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신학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막연한 신학적 의미를 붙들고
달려가던 대로,
아니 더 악착같이 더 가지려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자기 몸도,
피도 내어주는 나누는 삶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세례요한이 전한 회개의 삶의 연장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전파하고 전한 말씀의 삶을 살아내는
<실체>입니다.
둘째, 더 가지지 않는 삶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한 말씀의 두번째는 더 가지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가지기 위해 세리는 정해진 것 외에 것을 부가해서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이 말씀의 연장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 외에 것을 넘보는 인생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선외에 것을 넘보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그 선악과,
내가 조금만 욕심내면 얼마든지 더 가질수 있지만
하나님이 정한 것까지만 누리는 것이 세례입니다.
신학적인 의미가 어떻고,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가지고 세례요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누고>,
그냥 <더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도
하나님의 말씀도 어렵지 않은데
많은 성도들은 더 미묘하고
더 복잡하고
더 어렵게 성경을 풀고 이야기를 해줘야 뭔가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세례를 받는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더 가지기 위해 살아온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더 가지고
더 높아지기 위해
각자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더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의 삶입니다.
셋째, 자족하는 삶입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의 최고의 고백은
<자족>입니다.
세례요한이 군인들에게,
당시 힘을 가진 자들에게 원한 회개의 열매는
자족의 삶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은
힘을 유지 하기 위해,
그 힘을 더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힘이 없는 자들도 늘 힘이 있는 사람과 자리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진 자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힘을 얻으면 더 큰 힘을 누리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세례요한이 회개의 열매로 구한 것은
더 가지지 말고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 힘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럼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나누지 않고,
더 가지려 하고
자족하지 않는 세상 욕심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죽는 다는 것이 <세례>입니다.
늘 내 안의 죄 때문에 몸부림치고 갈등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몸부림치고
아파하고 세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픔은
더 나누지 않고
더 가지려하고
있는 것에 자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령 받은 후의 신자의 삶,
성령 충만의 삶은
함께 먹고,
함께 나누고,
함께 찬양하는 삶입니다.
세례는 성령충만의 각오이고
성령충만은 열매의 현장입니다.
세례를 무슨 뜬구름 잡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무슨 죄에 대하나 갈등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나눔>과 <나눔>과 <나눔>입니다
십자가는 내 피도 나누고
십자가는 내 살도 나누고
십자가는 내 자리도 나누고
십자가는 내 유업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세례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무엇을 기도합니까?
더 나누어도 하나님이 채우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더 나누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함으로 더 나누기 위해
결단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낮은 곳인 요단강,
내가 죽었다는 상징인 요단강으로 내려갈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나눌 때 이 소리를 듣습니다.
더 가지지 않으려고 정해진 것에 자족할 때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천국 천사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슨 신비와 무슨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작은 콩 하나도 나누고
그저 내 것 이웃과 나누는 삶이 세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자기를 나누는 것인데
십자가는 철저히 피와 살을 드리는 것인데
십자가를 지면서
더 가지고 더 잡으려는 우리이기에
십자가는 자꾸만 멀어지고
세례는 그저 천국간다는 잘못된 확신만 안겨주고 있습니다.
세례는 고백이 아니라
세례는 삶입니다.
<세례>는 한번의 행사가 아니라 평생 드리는
드림의 <삶의 체질>입니다.
세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기쁨과 사랑의 삶의 현장입니다.
* 몬스트로노스교회 세례식입니다.
세례는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단회적 결단에서 나오는 날마다의 고백입니다.
세례를 통해 내가 죽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날마다 더 가지고 싶고,
날마다 더 잡고 싶고
날마다 더 붙들고 싶은 세상에 대한 자신을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열매의 삶입니다.
세례는 나누지 않으려는 나,
세례는 더 가지려는 나,
세례는 만족하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는
더 <나누고>
더 가지려고 불법을 행하지 않고
더 가지려 하지 않고
자족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아십니까?
그럼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