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영광(눅1:57-80)
친척 중에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가 나오고
친척 중에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할 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두 사람이 친척입니다.
그런데 한 가문에 세례요한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문의 영광,
내 가정의 영광을 기대합니다.
내 자녀가 축복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하고
또 세상에서 이름을 높이고 잘 사는 아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별것 아니지만 천재 같고
별것 아니지만 여느 아이들과 달라보입니다.
다 내 자녀가 남다른 아이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이 집안으로는 영광이고 가문의 축복입니다.
"이야 어떻게 성령으로 아이가 태어나니?"
"역시 하나님은 목사 집안이니 아이가 특별한 축복으로 태어나나봐요!"
다 세상적으로 놀라운 아이들이 태어나고 가문의 영광으로 태아납니다.
그런데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 이름도 내 맘대로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름 한자도 부모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둘다 요한이라고, 예수라고 정해져서 태어났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가문의 영광은 내 자녀가 내 뜻대로
공부도 잘하고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을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문의 영광은 이름도 내 맘대로 짓지 못하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세례요한은 가정을 떠나 빈들에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가문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내 곁에서 나의 필요를 채우고
돈을 많이 벌어서 세상적으로 편안하게 사는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세례요한은 평생 빈들에서 낙타옷에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에 에배를 드리러 갔다가 아이가 없어져버렸습니다.
혼자 마음대로 합니다.
몇일을 돌아가서 성전에 가보니 부모에게 헛소리를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눅2:49) 라고 까지 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부모가 앞에 있는데 아버지 집에 있어야한다 하고
평생 부모 형제와 상관없이 제 맘대로 제 길을 갑니다.
이것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셋째,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태어나게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사는 것이 말 그대로 <비참>입니다.
한 아이는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세상을 욕하면서 살아갑니다.
한 아이는 갑자기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하면서
제자들을 불러모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니 자신이 믿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이게 무슨 가문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으니
부모는 내 아이는 특별하게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는,
세상 사람에게 인기가 있고
돈을 많이 벌고
높아지는 인생을 꿈꾸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삶이 말 그대로 비참입니다.
가난하고
남루하고
집도 없이 광야에서 빈들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무슨 가문의 영광입니까?
넷째, 비참한 죽음입니다.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이름도 지어주고
특별한 탄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목이 베여 죽습니다.
이것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그 키가 자라며 지혜롭고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갔다 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다.
이것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성경은 그것이 영광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가문의 영광입니까?
하나님께 <붙들린 삶>입니다.
이름 하나도 내 맘대로 지을 수 없고
집도 아닌 광야와 빈들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메뚜기와 벼랑의 석청을 먹으려 살지만
그들의 삶은 영광입니다.
왜요?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붙들린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비록 세상적으로 비참해 보이는 삶이지만
하나님께 붙들린 삶 자체가 영광입니다.
세례 요한의 가정과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은
놀라운 가문의 영광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의 영광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초라함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놀라운 가문의 영광이 됩니다.
왜요?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아서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더 좋은 곳에 거하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문의 영광이 아닙니다.
목사들은,
선교사들은 더 존경을 받고
더 대우 받기 위해 더 많은 성장과
더 높은 학교를 원합니다.
그것이 가문의 영광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삶,
가난한 살림이지만
그가 붙들린 삶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가문은 <영광의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 최고의
<가문의 영광>입니다.
어릴적부터 그것을 훈련시키지 않고
오직 부모가 원하는 가문의 영광의 기준으로 아이를
훈련시키고 공부시키고
학원으로 학교로 보낸다면
그 가정은 비록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다니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참 가문의 영광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가문의 영광에 맞는 아이로 키울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80)
강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여지다'는 말은 <수동태>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누군가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강하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손을 거쳐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문의 영광의 기준이 오직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아이를 키우니
아이가 심령이 강해지지 못합니다.
더 나은 형편,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다 보니
하나님이 쓰시기에 너무 약한 아이들이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말씀 때문에
빈들에도 있어보고
하고 싶은 것도 참고
공부보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는 강한 의지력을 키워야합니다.
가기 싫다고 하면 교회를 보내지 않고
원하지 않으면 부모다 늘 포기해 버립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
가문의 영광은 없습니다.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아이가 되게 하고 싶으십니까?
<심령이 강해야>합니다.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의 훈련입니다.
요즘은 믿는 부모들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힘들고 어려우니 다들 쉽게 살려합니다.
쉽게 아이들을 키우려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은 오직
당신의 손을 통해 강하게 키우는
심령이 강해지는 아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목사들만 바라보고 교회가 된다 안된다 하지 마십시오.
담임목사만 보고 있지 마십시오.
선교사가 선교를 잘한다 못한다 말하지 마십시오.
내 가정의 자녀가 심령이 강한 아이로 자라도록
훈련하고 교훈하고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살게 하십시오.
그런 부모의 날마다의 수고가 없이는
내 가문의 영광은 없습니다.
가문의 영광에 대한 기준을 바꾸고
그 기준에 맞는 훈련으로 심령을 강하게 만들 때
우리의 가정은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가문이 될 것입니다.
* 은빈이 다빈이 수빈이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삶>입니다.
뭔가 세상에서 특별한 아이를 기대하십니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삶이 우리의 기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오직 <가문의 영광>입니다.
다른 어떤 자격과 조건도 가문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비록 초라한 집과
비록 초라한 음식을 먹어도
하나님께 붙들린 삶이라면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가문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