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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끄러우십니까?

왜 부끄러우십니까?

 

 

 

 

 

 

 

 

 

 

 

 

 

부끄러우십니까? (눅1:24-45)

 

부끄러움입니다.

우리의 주소는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은 부끄러움에서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부끄러워 다섯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부끄러움> 가운데 일하십니다.

부끄러움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불명예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빈정거림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빈정거리고 사람들이 조롱하고

사람들이 비난함으로 안은

불명예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수치 가운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수치 가운데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수치 가운데 부끄러움 가운데 있는 인생을 그렇게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

결혼하지 않은 여인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끄러움,

수치와 불명예 가운데 숨었던 자들입니다.

이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만지심과 섭리로

세상에 명예를 회복하시고

세상 여인이 낳자 자중에 세례요한을 가장 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자로,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자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움 가운데 회복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수치를 주고

사람들에게 불명예 가운데 있는 나를 회복하십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심은 우리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없게 하려고 하십니다.

낮은 자를 통하여

천한 자를 통하여

세상이 가진 높음과 자랑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1:25)

 

부끄러움을 믿음을 인내하는 자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의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수치와 비난의 길을 지나지 않으면

찬란한 영광의 가로수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부러 부끄러움을 피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부끄러움은 세상의 삶입니다.

세상의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수치와 부끄러움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오직 주님 만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당한 수치를

길갈에서 물러가게 하십니다.

애굽의 수치

세상의 조롱과 종되었던 삶의 수치를

할례를 받는 길갈에서 물러가게 하십니다.

 

그분의 약속,

그분의 언약이 우리의 수치를 물러가게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부끄러움을 물러가게 것은

주의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평안>

<함께함>입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1:28)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물러가게 하는 것은

뱃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가능성이 아닙니다.

지금 안에 임한 하늘의 평안과 하나님의 함께함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높고 낮고가 아닙니다.

 

사라진 평안과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음입니다.

 

우리의 수치의 시작은 그분으로 인한 평안이 사라지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은 그것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세례요한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함께함>입니다.

 

 

우리는 없이 부끄러움이라 여깁니다.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이 수치라 여깁니다.

아닙니다.

수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에 평안이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주시려는 !

<평안>입니다.

 

진짜 수치를 수치라 여기지 못하고

수치 아닌 것을 수치라 여기는 것이 수치입니다.

 

가지지 못한 ,

없는 것으로 수치라 여기지 마십시오.

 

안에 평안이 임하고

안에 하나님의 함께함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그들이 아들들을 낳기 전에

이미 그들은 평안을 누렸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수치가 물러가고

그들의 삶에 세상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이기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평안> <함께함>,

 

하나님께서 세레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땅에 주시고 싶어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는 것이 수치를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치의 회복은

하나님의 평안과

하나님이 함께하심입니다.

 

 

 

 * 발방크교회를 찾아온 토고자니목사와 사모입니다.

교회를 이사하고 새롭게 양철교회를 짓고 사택을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선임목사로서,

선배로서 이제 시작하는 발방크교회 페트릭전도사를 격려하기 위해

토고자니 목사님 부부가 격려차 방문을 했습니다.

거리입니다.

그러나 열심을 다해 찾아와 격려하고

사역에 대해

교회에 대해 많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배가 고파도

집에 아무것도 없어도

세상 사람 몰라준다 해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을 통해 한마디의 말이

잡아주는 손이 그렇게 힘이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평안과 함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홀로 주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오늘 평안과 함께함을 당신을 통해 느끼게 하면 안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인 당신을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해

외로움에 신음하는 영혼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홀로 다릴지 말고

옆도,

목이 말라 힘이 없어

멀리 쳐져서 걸어오는 저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함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그들에게 로뎀나무 아래 천사가 되고

수치 가운데 있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 온것처럼

당신이 그들에게 하늘의 천사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

당신을 통한 <평안> <함께함>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