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믿는 복음은 <사실>입니까? (눅1:1)
복음의 기초는 <사실>입니다.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1)
성경은 사실에 근거한 일들을 증인들이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복음은 사실에 근거하여 알고 있는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1:4)
한마디로 성경은 <사실>에 근거하여 <본> 사람이
전한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첫째, <사실> 입니다
사실을 전한다는데는 어떤 누구도 이견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실을 전하느냐입니다.
복음이 전한 사실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의 <변화의 사실>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잘됨을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전해 들은 사실은
성경이 말하고 전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한국교회를 망친 목사의 한마디가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축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이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에 대한 사실을 <오해>합니다.
성경은 예수와 그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그 증언이 같은 사실을 두고 다른 면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복음과 고난을 말하고
우리가 듣고 말하는 것은 복음과 축복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고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에 대한 소망과 희망으로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핍박도 감수하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경을 전하는 자들의 사실이
<복음>과 <고난>이 아니라
<복음>과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복음과 함께 주를 위해 살면 하나님의 보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사실을 증거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복입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복이 목적이 되어
전해지는 사실은 고난이 아니라 축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실이 복음과 고난과 핍박이 아니라
복음과 오직 축복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곳 남아공에는 독립교회들이 많습니다.
전체 기독교중에 거의 70% 이상이 이 독립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백인들이 들고 온 복음과 그들의 샤마니즘과 합쳐져서
이상한 괴물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직 주술과 미신과 조상숭배와 기적만 남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이지만 교회가 아닌 교회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면 외면당하고 오직 병이 낫고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주술과 우상숭배와 그에 맞는 축복 받는 비결만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사실이어야합니다.
복음은 사실이어야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증거와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한쪽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과 고난의 기록이 성경인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증인의 기록인데
우리는 이 내용은 없고 오직
복음과 축복만 남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화가 납니다.
복음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 놓으라 말하면
욕을 합니다.
복음 때문에 예수를 위해 살라고 하면
목사를 외면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오직 축복을 외치고
오직 복을 외치는 교회가 넘쳐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실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영원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영원을 얻었기에 이 땅에서의 고난도 핍박도 가난함도 감수하고
영원함을 누리는 기쁨 때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영원에 대한 기쁨보다
이 땅의 <축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이어야 복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전해야 복음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외면하기에
목사는 자꾸 성경이 말하는 사실이 아니라
세상이 좋아하는 <축복의 사실>에만 초점을 두고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서
사실을 사실로 전하지 못하고
부분적 사실이 복음의 전부인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실을 전하는 하나님이 원하는 복음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본 것>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목격자 입니다.
목격자는 증인을 말합니다.
본 것을 말하는 것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 것은 자기가 중요하게 본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인해 받은 <축복>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지만 자가기 관심 있는 것만을 전합니다.
성경의 기록자는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고난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고 읽은 우리들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 믿고 <잘 된 것> 만 전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을 보장 받음을 말합니다.
이 땅이 아니라 영원의 삶을 기초한 삶이 복음의 삶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삶이 영생이 아니라
더더욱 이 땅의 축복에 연연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는 것만 붙들고 살아가는
영생과 영원이 내 안에 있음으로
이 땅의 모든 아픔과 핍박과 수고를 감수하는 삶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원을 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영원이라는 사실이
이 세상의 축복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영원에 대한 확신과
영원에 대한 감격으로 살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
더더욱 세상 사는 것에 집착하고
오직 축복 받는 것에만 사람이 몰리는 현상이 자연스런 복음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말씀을 <전한 사람>의 책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나와 같은 목사,
나와 같은 선교사의 책임입니다.
남아공 교회에는 아직도 조상신 숭배가 당연하게 여깁니다.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노회에는 소장파와 노장파의 갈등이 심합니다.
이유는 조상신 숭배와 제사 문제입니다.
소장파는 저희들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젊은 목사들입니다.
그런데 노장파는 이미 복음을 20년 전에 백인 선교사들에게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 백인 선교사들의 정책이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다보니 다들 조상신 숭배가 집집마다 심했습니다.
그런데 백인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합리적인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냐면,
그들의 생각은 이들이 복음을 알면 조상신 숭배는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에게 조상신 숭배에 대한 금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 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합리적 생각이 교회를 망쳤습니다.
지금 남아공의 수 많은 교회 성도와 목사까지도 아직 조상신 숭배와 제사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
사실에 근거하여 복음이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자기가 보는 관점에 따라 전했던 증인들에 의해
남아공의 교회는 수십년이 지나고 수 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상신 숭배와 제사와 싸워야 하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중간에 전하는 증인들,
중간에 전하는 목격자들이 무엇을 전하느냐가 후손들의 교회와 신앙은 너무나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사실을 전해야하는 숙제를 남겼습니다.
사실을 전해야하는데
전하는 자들이 자기들 나름의
<예수 믿는 이미지>를 만들고
<예수 잘 믿는 표본>을 만들어서
그것을 복음으로 둔갑시켜 전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가 부흥하고
네 명 중에 한 명이 예수 믿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만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세상에 인식되어 졌습니다.
남아공처럼 말입니다.
온 나라에 마을마다 교회지만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고
아무도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처럼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고 목사라고 하면
정상으로 쳐다보지 않는 교회가 되고 있는 이유!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전하지 않고
자기가 만든,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실만 전하고 증거한 이유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내 목숨을 내어 놓고 다른 강도 만난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내 원수를 사랑하고
나보다 다른 이의 유익과 잘됨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감격이 있기에
그 영원이 보장된 감격을 기초로 이 땅에서의 삶이
핍박이고 손해고 눈물이어도
감격으로 평안으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삶입니다.
영원이 보지 못하게
오직 이 땅의 축복만 다인것처럼 말하고 전하는 이곳에는
남아공의 교회들이 행하는 사실이 없는 복음과 교회가 될 뿐입니다.
사실을 말해야합니다.
복음은 축복만 아니라 고난도 당하는 것입니다.
축복보다 고난이 더 복음에 가깝습니다.
고난의 사실은 말하지 않고 오직 축복만을 말하는 교회가 되면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면 교인들이 싫어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교회가 부흥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사실을 전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려했던 사단의 무기는 세상의 잘됨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무기는 자신을 고난 가운데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사실을 말하고
사실을 전하고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잘 것만 붙들고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잘됨>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저 묵묵히 복음의 사실을 붙들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복음입니다.
셋째, <확실하게> 입니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1:4)
성경은 내가 아는 바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무엇을 확실하게 합니까?
축복입니까?
고난입니까?
십자가입니까?
영광입니까?
복음과 함께 축복을 받으라를 확실히 하십니까?
아니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을 확실히 하십니까?
우리의 본성이 가고자 하는것과 반대로 가면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늘 세상에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과 나의 본성이 가고자 하는 반대로 가면 됩니다.
우리가 확실히 할 것은
<복음>과 <축복>이 아니라
<복음>과 <고난>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영원을 보장 받은
이 땅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혹 아직도 성경이 말하는 사실이 아니라
다른 사실을 붙들고 확실하게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잘 사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인기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이 기록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 그림과 사실을 혼답합니다.
그림에 우리는 와~합니다.
그래서 그림 같은 세상을 꿈꿉니다.
아닙니다.
그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림이 아무리 이뻐도 그림은 그림입니다.
집중해야 할 것은 사실,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림 속의 어떤 세계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림입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은
<사실>만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복음은 사실에 근거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꾸 그림 속의 세상을 꿈꾸게 합니다.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의 그림이 아니라
고난의 현실이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그것이 축복입니다.
영원이 있으니 이 땅의 삶이 감격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힘은 영원의 보장입니다.
잃어버린 영원의 회복!
그것이 복음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증인이 됩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목격자가 됩니다.
영원을 보지 못하니 이 땅에서 그리는 꿈의 그림만 남습니다.
영원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