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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15:1-15)

 

사람의 시기의 끝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의 본심은 <시기>입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15:10)

 

열심도 있고 신앙도 있고 하나님을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사람도 자기 보다 되면 참지를 못합니다.

형제가 나보다 잘하고 자매가 나보다 이쁘면 미운 것입니다.

 

나보다 존경을 받고

나보다 설교를 잘하고

나보다 사역을 잘하고

나보다 뭔가를 잘하면 그냥 미운 것입니다.

 

자리가 자리인데

높은 자리가 자리여야하는데라는 생각에 견디지를 못합니다.

 

시기의 끝은 둘중에 하나가 죽어야합니다.

내가 죽든지 그가 죽든지 해야합니다.

대제사장들의 선택은 결국 시기의 대상인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잘하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사람은 하는대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안됩니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나보다 잘나면 죽여야하는 것이 본심입니다.

사라져야 속이 편합니다.

 

사울이 결국 그렇게 것은 시기입니다.

분명이 자신이 왕인데 어린 다윗,

상대도 되지 않는 다윗을 향한 세상의 소리에 미쳐가는 것입니다.

 

믿음 없음의 다른 모습은 시기에 충만한 것입니다 .

사단이 찾아와 아담에게 있는 유일한 것이었던 믿음을 빼앗았습니다.

미끼는 바로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자리처럼 여기게 것입니다.

믿음을 죽이는 미끼는 바로 <시기>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기가 얼마나 강력한 미끼인지 형제도 죽이게 합니다.

 

어디 형제 뿐입니까?

스승도 못알아보고 팔아버립니다.

 

시기는 얼마나 대단한지 하나님도 못알아보고

예수님도 죽이는 강력한 미끼입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 보이는 자라도 겉으로는 멀쩡한데

시기로 가득찬 사람들을 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울 왕도

세상을 가진 아담도 이기지 못한 것이

<시기심>입니다.

 

 

대제사장!

하나님을 가장 친밀하게 섬기는 자리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자리를 가진 그들이지만

결국 그들의 시기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죽어야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안락과 쾌락과 안위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죄의 미끼는 <시기>입니다.

욕심의 고향은 비교의 그릇에 담긴 <시기>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겉이고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는 <시기심>으로 시작한 사역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시기심>이라는 바늘이 입에 물리면

양심도 없습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요나단이 아무리 말려도 사울 왕은 다윗을 끈임없이 죽이려합니다.

미안하도 말하고 후회하고 반성해도

시기심의 끝은 하나님이 죽어야 하기에 끝날줄 모르는 싸움이 됩니다.

 

아무리 빌라도가 아니라해도 이미 입속에 들어온 시기심의 미끼가

나를 끌고 갑니다.

바라바라 소리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라 고함칩니다.

강도와 살인을 저지른 자입니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서슴없이 합니다.

바라바~바라바~

양심은 없고

가책도 없습니다.

시기심이 자신의 양심도 가책도 체면도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기심의 끝은 하나님이 죽는 것입니다.

자리에 내가 앉아야 속이 편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도 먹고

그래서 예수님도 죽입니다.

 

<시기심>입니다.

 

 

하나님도 질투 하십니다.

우리를 질투하십니다.

질투의 ,

시기의 끝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기의 끝은 자신을 심판하고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시기심의 끝은 형제를 죽이고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심판하고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기심의 해결책입니다.

인간의 시기심은 누군가를 죽이고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기심의 해결책,

질투의 해결책은 자신의 죽으심입니다.

 

 

믿음은 길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우리 세포세포 속에 숨은 잘되는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에 대한 해결은

오직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잘되는 사람을 세우는 !

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

하나님이 세우심을 인정하는 !

그들을 향하여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생기는 문제는 거의 대부분 시기심에서 나옵니다.

교역자와 교역자가 싸우는 ,

선교사와 선교사가 싸우는 ,

형제와 형제가 싸우는 본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잘되는 꼴을 못보는 시기심이 대부분입니다.

 

잘해도 욕하고

못해도 욕합니다.

내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의 못남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에 박수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세상의 대표인 빌라도,

종교의 대표인 대제사장은

결국 시기심에 의해 예수님을 죽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사람이 받는다 생각하기에

내가 받아야 축복을 사람이 받는다 생각하기에

내가 누려야할 복을 사람이 빼앗아 간다 생각하기에

우리는 믿음의 한계를 보입니다.

 

아담도 그렇고

사울왕도 그렇고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세상도 그렇습니다.

내가 낫다고

내가 사람보다 낫다는 시기심에서

우리는 오늘도 마음을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살인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시기심의 답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미움> 시작은 <시기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이유!

 

<시기심>입니다.

 

 

 

 * 한국에 주신 축복이 흘러 넘칩니다.

그런데 한국의 축복의 기초는 <비교>이고 <시기>입니다.

나라가 발전하고 교회가 발전할수록

안에 마음은 미움이요 다툼이고

경쟁이요 싸움이 됩니다.

대제사장이,

아담이 뭔가 부족해서 예수님을 죽이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를 향한 비교와 시기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축복이나

발전할수록 허전함과 공허함이 더해지는 나라가 되고

교회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대안,

예수님의 걸음은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시기심과 비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세상은 너를 바꿔서 나를 채우려합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 죽여서 <세상> 바꾸는 것입니다.

길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답답한 세상에 마음 한번 펴시라고 오늘은

바다 사진입니다.

 

호흡한번하고

세상을 바꿔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꿔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그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