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대답과 베드로의 대답이 다른 이유(막14:43-72)
세상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따지는 것은 무엇을 말 했느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따지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했느냐?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따지는 내용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은 죽일 증거는 잡으려는 세상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했다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때리고 조롱을 하고 욕을 하고 채찍을 쳐도 아무 대답도 아니하십니다.
오직 무엇을 했느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침묵>입니다.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14:61)
우리가 해야할 훈련은 뭔가를 많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한 일을 말하고 싶어하고
누군가의 질문에도 수 많은 변명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한 일이 사실이고
내가 말 한 것이 참일지라도
내가 뭔가를 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이 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어떤 질문에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유일하게 대답을 하십니다.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14:61-62)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내가 한일>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가 예수님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고
세상에 대하여 말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일과 한 말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합니다.
내가 한 일을 말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죽이려는 자들에게 아무 증거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말하면 정말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놓치지 않은 것은
내가 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세상에 알립니다.
우리는 침묵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떠벌리고
말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로 자기를 증명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 자기를 증명합니다.
그 자기 증명을 이뤄내기 위해 자기의 정체성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살아서 이루려는 인생은 평생 허전함입니다.
이미 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네가 무엇을 했느냐로 접근할 때
그분은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로서 세상에 자기를 증명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대답
동일한 울타리 안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이 그에게 질문합니다.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
너도 같은 도당이다~
너는 갈릴리 사람으로 예수와 같은 사람이다~"
베드로에게 무엇을 했느냐를 질문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있었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것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잃어버릴 때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잃어버리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알리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죽게 될것을 아십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예수와 함께 한 사람임을 알게 되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자신이 행한 것을 말하라는 세상에
행한 것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누군지 말합니다.
베드로의 답은 자신이 누군가를 말하라는 세상에
누군가를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은 뭔가를 이루어서 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되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함에 대해서 침묵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베드로는 존재를 부인하고 행함이냐 행하지 않음이냐를 증명합니다.
세상은 행함으로 우리를 평가합니다.
세상은 네가 그것을 했느냐 안했느냐로 평가합니다.
잘하면 잘했다하고
실패하면 실패했다고 조롱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에 대하여 잡고 있는 한가지는
<내가 누군가> 입니다.
뭔가를 행함으로 자신을 이루려는 사람은
늘 행함 중심의 말과 증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미 되어진 사람은
되어진 존재를 살기에 뭔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말고
존재함에 맞는 행함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평가하는 세상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함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존재를 부인하면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다 잃어도 자신의 존재함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죽어도 살리십니다.
세상은 가짐으로 행함으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함을 아는 자만이 행함에 자유 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행함으로 자신을 알리지 말고
존재함으로 세상에 행하십시오.
세상은 언제든지 우리가 행한 것으로 조롱하고 책망하고
거짓 증거로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행한 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내 존재함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기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과
베드로의 대답이 다른 이유입니다.
*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가족으로 시작했다 남남으로 가려합니다.
가족이 실수하면 가족 관계를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존재가 가족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합니다.
가족인데 가족으로 시작했는데
실수한다고
부족하다고
못났다고
몰아내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고
쫓아내려 합니다.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흔번에 일곱번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남남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존재됨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형제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수하는 베드로는 내치지 않고 끝까지
끌어 앉는 것입니다.
가족이라서 그렇습니다.
내 부모요 형제라서 그렇습니다.
내 존재됨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도 이해를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싸우고
몰아내고
쫓아내고
그래서 가족을 망치는 것입니다.
내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입니다.
내 형제들입니다.
내 가족들입니다.
내 존재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내 목숨을 내어줄지라도
사랑하면 안되겠습니까?
비록 실수해도 말입니다.
부족함이 보이면 내가 더 채우면 안되겠습니까?
연약하면 그 짐을 내가 지면 안되겠습니까?
가족이니까~
내 자식이니까~
내 형제니까~
내 존재함을 아는 사람!
그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행해서 존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