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반대는 성만찬입니다 (막14:10-26)
돈입니다.
제자들이 분개한 이유도 돈입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판 대가도 돈입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분개하고 돈 때문에 사람을 팔아버립니다.
그런데 사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기준입니다.
자신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 돈을 잡으려합니다.
제자들이 분개한 이유는 돈을 허비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는, 세상을 위한다는 명분입니다.
그 명분 앞에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붇는 행위는 사치입니다.
다 자기의 명분,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자기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위한다는
나라를 구한다는
교회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시작했습니다.
명분도 좋습니다.
나라를 구하고 조국을 구하고 교회를 구한다는 명분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의 마지막 변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과 그들의 길은 다릅니다.
진짜 교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돈으로 결론이 나면 그것은 <사심>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사건과 가롯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판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돈으로 결론이 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길과 다른 길입니다.
돈으로 결론이 나는 이유는 결국 자기의 유익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 <사심>입니다.
사심이 있으면 결국은 돈으로 결론 나게 됩니다.
아무리 자신의 명분이 교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한다 할지라도 돈으로 결론 나는 모든 것은 사심입니다.
사심이 있는 곳에 하나됨이 없습니다.
사심이 있으면 선한 일도 자신의 목적과 다르기 때문에 분개하는 일이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자신의 사심이 있으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심의 마지막은 돈이 됩니다.
사심이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더 분개합니다.
목사가 돈을 어떻게 썼고,
교회가 돈을 이렇게 쓰면 안되고,
다 돈에 관한 문제에 더 민감한 사람들이 사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잘 살펴 보십시오.
의로운 명분을 말하고 가난한 자를 위한다는 거룩한 명분은 있지만
거룩한 소비는 없고
오직 돈에 관련된 사심만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말이 논리가 있고 고상하고
거룩한 명분을 말하며 분개하지만
그 마음의 배경은 다 자신이 가진 사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길은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과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을 하나로 묶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성찬을 하시는 것과 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이 분개하고 정의를 외치는 것은 결국 돈입니다.
그런데 그런 돈의 명분을 내 세우는 세상에 예수님의 대안은
자신을 주심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심이라 하십니다.
세상이 그 어떤 명분과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위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은 오직 돈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 돈보다 귀한 자신을 드리는 것이
세상의 <마지막 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거룩한 명분을 말하며
돈을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논쟁합니다.
분개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는 최고의 답입니다.
바르게 쓰고 바르게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내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가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버립니다.
<사심>의 끝은 <예수>를 팔아서 자기 손에 <돈>을 쥐는 것입니다.
어떤 거룩한 명분이 있어도
예수를 팔아서 자신의 손에 돈이 들어오면 그것은 <사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한 마지막 답은
자신의 손에 돈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든 명예든 자리든 가지는 것이 답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의 답은 돈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에 세상의 답입니다.
예수님이 몸과 피를 내어주자 그 덕을 우리가 누리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더더욱 사심으로 돈을 잡으려 합니다.
세상보다 더 강력한 <돈 모으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수록
자신을 더더욱 내어주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손에 돈을 쥐는 돈 모으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돈이 모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돈이 없으면 뭔가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돈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내어 놓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요셉은 평생 자신의 것을 잡기 위해 산적이 없습니다.
요셉은 평생 거룩한 명분을 위해 자신의 것을 채운 인생이 아니라
평생 죽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준 삶입니다.
형들을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에 말없이 길고 긴 나날을 여행합니다.
그렇게 형들에게 팔립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죽어라 일합니다.
자신의 것을 위하여 살지 않기에 보디발은 집안 전부를 맡깁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사심으로 살았다면 감옥에서 간수장이 죄수를 모두 요셉에게 맡겼겠습니까?
사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굽의 바로 왕이 그에게 총리 자리를 맡겼겠습니까?
우리는 요셉의 <축복>만 보이고 요셉이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희생이 답입니다.
그 답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을 하며 우리는 더더욱 다짐을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더더욱 열심히 돈을 모아서 교회를 위해 살아야겠다~
아닙니다.
돈은 또 다른 분쟁을 만들고 분개하게 하고
예수님을 팔게 만듭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성만찬의 정신입니다.
성만찬의 기초는 <언약>입니다.
피로 맺은 언약,
자신을 내어준 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 땅을 살지만 저 하늘을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 하늘을 보장 받은 인생이
이 땅에서 돈에 더 더욱 연연하고
이 땅에서 축복만 중요하게 여기는 <돈 모으는 괴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내 놓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붇는다고 분개하는 제자들이 됩니다.
다 사심입니다.
돈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사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목사가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가 돈을 너무 많이 받고 교회가 돈을 그렇게 쓰면 안되고 하는
돈에 관련해서 다 말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분개하는 제자가 되고
가롯유다가 되기 쉽습니다.
셋째, 자신을 내어 주지 않으면서 내는 분개와 논쟁과 논리는 다 사심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은 말로 조지지 않습니다.
말에 빠지면 엉덩이가 하늘로 가고 머리는 물속으로 간답니다.
왜요?
물고기 하고 이야기 하려고 말입니다.
제자들도 가롯유다도 대제사장도 사기관도 변화되지 않으면 다 말로 조집니다.
말이 다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자신을 던집니다.
자신의 가진 것은 물로 자신의 몸과 피를 다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말보다 삶이 많아져야 겠습니다.
분개보다 내 삶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자신의 사심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땀과 피를 내 놓아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합니다.
옥합도 깨뜨리지 않고
자신의 피와 땀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삶도 다른 이를 위해 내놓지 않으면서
오직 말로 조지는 인생들이 되어갑니다.
돈으로 결론 나는 괴물이 되고
손에는 돈을 잡고
말로만 세상을 조지려는(움직이려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답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목사가 욕을 먹는 이유는
말보다 삶이 따르지 않아서입니다.
저울로 재봐서
말이 삶보다 가벼우면 우리는 결국 가롯유다가 됩니다.
삶이 무거워야 합니다.
사심이 많으면 말이 많아지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면
말보다 삶이 아름답게 됩니다.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 없는 말을 쏟아 놓습니다.
거룩한 명분이라는 이유로 수 없는 논쟁에 분개합니다.
그런 세 상속에
예수님이 택한 길은
자신의 <살과 피>입니다.
<돈>의 반대는 <성만찬>입니다.
사심의 마지막은 돈이고
그 돈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입니다.
가짐이 아니라 드림이 세상의 대안입니다.
자신의 살고 피를 내어주지 않는
어떤 말과 논리와 싸움은 결국 <사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사심>보다 앞서야합니다.
그것이 내 삶에 펼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내 삶에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
천국은 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성만찬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
천국의 얼굴입니다.
* 수 없이 성만찬을 합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만 묵상하고 감격해 하면서
세상을 위한 내 삶의 희생과 섬김은 묵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만찬과 십자가의 의미는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나의 것을 드리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이 많으니 성만찬과 십자가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말로 변하지 않고
섬김의 감동으로
희생의 수고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의 말을 그치십시오.
하나님을 위한다는 분개와 논쟁을 그치십시오.
세상은 말과 분개와 논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사심의 끝은 돈입니다.
돈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길을 택해야합니다.
오직 자신을 내어주는 살과 피,
희생과 섬김으로 세상은 변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섬김이 없는 어떤 말과 명분도
제 눈에는 가짜로 보입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사는 우리가 되어야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를 알림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성만찬과 십자가의 참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