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가 아니라 위로의 사람입니다 (막14:1-11)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너무 합리적인라는 것입니다.
때로 믿음의 걸림돌은 <의심>이 아니라 <합리>입니다.
오늘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분개하는 제자들입니다.
한 여인이 일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 성경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하는데 민란이 날까 두려워 명절에는 피하자고 합니다.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예수를 이용하는 인생,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는 인생은 철저히 합리적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은 의심이 아니라 합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과 반대의 길을 가게합니다.
이들은 늘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인생의 축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인생을 펼치는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섬길 대상으로 자랑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 권력과 내 축복을 흔들 수 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늘 나의 것을 지켜야 하고
보호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내 속 마음을 알면 그 자리가 무서워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두렵고
그래서 정직한 사람이 두렵고
그래서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두렵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늘 사람들이 존경하는 예수님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늘 두려움이 있습니다.
축복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위에 세워진 자신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제자들입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붓자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이 분개합니다.
왜요?
<합리적>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그 많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좋은데
한번 만에 머리에 부어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한마디로 투자 가치 없는 곳에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세운 명분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자는 것입니다.
합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나누려합니다.
합리를 내 세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것을 철저히 숨기고 다른 이의 것으로 합리를 따집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논리는 맞습니다.
그 많은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의 돈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늘 합리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둘째, 때를 알지 못합니다.
합리의 함정은 보편성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직 한 때입니다.
이 여인이 부은 향유은 예수님의 인류를 위한 한 때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격려와 위로입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리는 예수님을 위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왜 예수님이 문둔이 시몬의 집에 거하셨을까요?
십자가를 지기전에 편하고 좋은 부자집이 아니라 문둥이였던 시몬의 집일까요?
합리적으로 계산적으로 편안하고 좋은 시설을 원했다면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집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둥이 시몬의 집입니다.
왜요?
셋째, 합리를 내 세우는 사람들은 함께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똑똑하고 시대를 분별하고 세상사는 물정을 잘 알면 좋은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정말 힘들고 어려울때 맘 편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지 못합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은 합리도 없습니다.
이성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려는 예수님이 맘 편히 쉴 수 있는 쉼의 공간이 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합리를 따지고 왜 이렇게 하느냐고 분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옆에 있을 때 그저 예수님의 가는 길에 맘 편히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리는 문둥이 시몬과 향유를 부은 여인이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유일한 <위로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잘 사는 합리와 이성을 가르쳐주었느냐보다
가장 어려운 길을 갈 때 얼마나 위로의 사람이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여인이 행한 일도 기억되리라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얼마나 합리적인 인생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힘든 인생에게 위로의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모든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 조차도 합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십자가 앞에
유일하게 자신의 길에 위로의 사람으로 다가온 여인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잘 살아보려는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의 축복을 확보하려는 사람은
결코 위로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시대가 발절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중요하기 때문에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이성적을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저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이것이 문제고…
그곳에는 쉼이 없습니다.
위로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편안하게 한숨 자고 갈 수 있는 곳,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식사한끼 따뜻하게 먹고 다시 힘내어 갈 수 있는 사람,
세상 사람 다 투자의 가치와 투자의 효율성으로 다가올 때
말 없이 웃음으로
조건 없는 식사로
대가 없는 정성 어린 격려의 봉투로 그들이 걸음에 위로가 되면 안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향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합리적인 사람들을 기록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가룻유다입니다.
1절과 10절은 그들의 이야기 입니다.
세상은 합리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념하고 기억하고 온 천하에 아름다운 일은
그런 세상에서 위로의 사람으로 남는 일과 사람입니다.
다른 새해가 되어 더 열심히 달려가고 복을 원하십니까?
그래서 더 합리적이고 더 계산적이고 더 이성적인 판단과 계산으로
세상의 사업과 직장에서 싸우려고 하십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가는 걸음에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자신의 모았던 마음을 내어주고
삶을 내어주는 말 없는 위로가 기억될 일이라 하십니다.
투가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투자하십시오.
신앙의 세계는 합리와 이성으로 다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합리와 이성의 반대로 가야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가 그렇고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렇고
갈리리 어부가 제자가 된 것이 그렇습니다.
나 자신도 합리와 이성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너무 투자 가치,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선교 보고를 할 때 잘 하는 선교사님만 더 많이 후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설교를 잘하는 목사만 사랑을 받습니다.
큰 교회 목사만 존경을 받고
공부 잘하는 놈들만 세상이 알아줍니다.
선교 열매 없는 선교사를 마음으로 더 안아주면 안되겠습니까?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그저 마음으로 위로하면 안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설교 잘하고 사역 잘하는 목회자만 사랑하지 말고
저 같이 설교 못하고 열매 없는 사역자도 칭찬하고 식사 대접하고 선물도 주면 안되겠습니까?
공부 잘하는 자식만 아니라 공부 못하고 사고 치는 자식도 안번 안아주면 안되겠습니까?
저는 사역도 못하는 선교사이고
저는 설교도 목회도 모르는 목사이고
교회 안에서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이고
공부도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사람이 더 마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이상하게 그런 투자 가치 없는 자들을 사랑하신답니다.
저 같이 덜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교육이 아니라
삶의 작은 것에 대한 모범을 본적이 없습니다.
진리의 교육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에서 어떤 이를 더 사랑해야 하고
어떤 이를 진짜 위로 해야 하는지 본적이 없습니다.
사랑할 자격 있는 잘 나가는 분들만 대접하고
투자 가치 없는 사람은 내쳐지는 것만 보고 자라서
진짜 예수님이 원하는 삶의 기술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삶에서 위로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그 기술들을 배우며 좋겠습니다.
인생은 지적할 때 변하지 않고
인생은 위로의 사람을 만날 때 변하는 것입니다.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전사>가 아니라 위로의 사람이 먼저 되십시오.
주님이 기억하라는 사람은 전사가 아니라 <위로의 사람>입니다.
* 피곤한 인생에 다리 밑에서 쓰러진 한 인생입니다.
지치고 상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제 평생에 관심은 내가 얼마나 잘 싸울까가 아닙니다.
얼마나 위로의 사람이 될까입니다.
착각합니다.
전쟁이 내게 속한 것으로 말입니다.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사만 되려합니다.
그래서 합리와 이성와 계산으로 무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논리도 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무장합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다들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피 흘려 싸우는 전사를 만나기 전에
맘 편히 쉴 수 있는 위로의 사람을 먼저 만나고 먼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전에 문둥이 시몬을 먼저 만났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먼저 만났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십자가로 가라 말하지 말고
십자가 전에 맘 편히 쉴 수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이 되고
평생 전사로 싸우기 전에
평생을 모으고 걸었던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거룩한 낭비를
위로의 사람으로 먼저 드리십시오.
아무리 예수님도 위로의 사람으로 인해 먼저 위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연약한 사람인데 그저 싸우라고
전사라 되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전사가 아니라 위로의 사람이 되십시오.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물과 떡과 천사의 위로였지
사명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양과 염소를 가를 때 하는 질문!
얼마나 잘 싸웠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위로의 사람이 되었느냐입니다.
형제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