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깊은 골짜기 (막12:35-40)
늘 질문만 받던 예수님이 이제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몇 안 되는 질문입니다.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장 잘 안다는 서기관들이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고 가르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 알고 다 가르치지만 정말 하나님이 알기를 원하는 한가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서기관들의 수 없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가?
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가?
당신들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왜 안 지키는가?
어떤 권세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수 많은 비유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질문을 하십니다.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데 왜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했는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성경을 옮기는 사사로 가르치는 교사로 서기관의 일을 하는데
정작 성경이 말하는 성경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특심인데
가장 중요한 핵심인 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부재>라는 말입니다.
정확한 지식 없는 열심은 결국 자신도 죽이고 다른 이도 죽입니다.
온 나라가 믿고 따르고 섬기던 일이 정확한 지식 없이 달려가는 기초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로부터 수 없는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접어두고 오직 한가지를 질문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누군가?
다윗의 자손인가 아니면 다윗의 주인가?
내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분이 무엇을 원하고
그분이 어떤 곳을 향하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가운데 내는 모든 열심은 결국 그리스도를 기다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해방할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힘 있고
권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구세주 말입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예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여버립니다.
내가 기다리고 그리던 다윗의 자손이 아니니
그냥 죽여버립니다.
세상의 왕으로 오셔야 하는데
세상에서 나라를 세우고
세상에서 힘을 떨치고
세상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초라하고 힘없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지내는 구세주는
자기들에게 필요 없는 메시야입니다.
그래서 죽여버립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립니다.
한국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고 달려왔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세상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산다는 그림을 그리고 달려왔습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고
세상에서 높아지고
세상에서 잘되는 기대를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오직 잘 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주는 없고
다윗의 자손,
세상을 해방하고 내가 원하는 기대를 이뤄주시는 구세주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내가> 기대한 메시야이고
<다윗의 주>는 <주님이> 원하는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수 많은 서기관들의 질문에 오직 이 한가지를 질문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 믿는 결과를 기다리면 우리는 결국 망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는 주님의 메시야를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를 믿는 마지막은 우리가 <왕>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원하는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가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으로 오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왕을 기대했습니다.
왕을 기대한 그들에게 종으로 오신 주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침을 뱉어도 되고
뺨을 쳐도 되고
채찍으로 때려도 되고
십자가에 못박아도 됩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된 이 세상의 시작은 왕이 되기 원하는 순간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이유는 능력을 받아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닌데
성령을 받아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이름을 내고
세상에서 다시 자기의 자리에서 왕이 되려합니다.
높아지려 합니다.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서기관들의 삶의 핵심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긴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서기관이라는 것입니다. (12:39)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을 병을 고치고
예수 믿고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이름을 떨치고
문안을 받고
있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교회가 다윗의 자손만 생각하고
다윗의 주를 생각하지 못하니
내가 원하는 것이 꼭 서기관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왕이 아니라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섬기기 싫어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과 함께 거하며
주님이 아무것도 안하고 대접을 받으셨을까요?
나무를 자르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물을 떠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대접하는 대로 그저 앉아서 왕으로 대접을 받았을까요?
성경을 가장 잘아는 서기관들처럼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놓치고 살아가면
결국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
다윗의 자손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대하던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는 그림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는 예수를 얻기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
결국 예수를 죽입니다.
내가 그리던 예수를 믿기 위해 더 많이 예배드리는 사람이
결국 사람들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만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신 이유는 왕이 아니라 종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왕만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왕으로 살려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종으로 오셨습니다.
종으로 사는 것!
그것이 예수 믿는 이유가 되어야합니다.
왕을 기대하는 사람은
늘 있어 보이는 옷에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종으로 사는 사람은
올라 갈 수록 낮고 천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이 이야기를
아무 힘 없는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 김완용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다리밑 교회입니다.
길거리 식구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병으로 상처로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붕은 고속도로 다리이고
벽은 철길을 막기 위해 막은 담이 벽입니다.
문도 없고 의자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다리 밑 교회입니다.
한국에서 선교 차 왔다가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다들 감동하고 다들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그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가고 나면 이분들이 곧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가난하고 초라하고 말도 안 통하고
늘 술에 싸움에 취해서 병으로 세상의 외면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곧 마음에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아마 이분들 같은 인생과 함께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의 옷을 입은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내 인생도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다윗의 자신으로 오시는 그럴듯한 인생을 꿈꿉니다.
정작 주님은 다윗의 주로,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과 함께 하셨는데
우리는 서기관처럼 자꾸 내가 그리는 예수만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예수님의 길과 마음을 찾을 수 없나 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만 아닙니다.
다윗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그분의 길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저 높은 산이 아니라
저 낮은 골짜기에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