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끝은 누군가에게 주는 <유익>이어야 합니다. (막12:28-34)
간만에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계명 중 첫째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예수님은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받아서 서기관이 대화를 받습니다. 어떤 제사보다 재물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최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간만에 예수님이 대화 상대를 만났습니다. 서기관의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만나는 사람 중에 대답도 잘하고 질문도 잘하고 그 말함이 참 지혜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목사님들 선교사님들의 말과 논리는 따르기가 힘이 듭니다. 그들의 논리와 지혜가 참 깊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서기관은 유일하게 예수님과 대화가 되고 지혜로움이 깊은 사람입니다. 이정도 수준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
서기관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질문을 하고 좋은 대답을 하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서기관은 예수님이 대답 잘하신다 함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질문을 잘하고 대답을 잘하고 현 정세를 잘 파악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남들에게 주목 받는 글과 말의 지혜를 가지면 잘 사는 사람으로 당연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 사람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12:34)
이정도 지식과 지혜와 대화의 깊이면 "하나님 나라에 있도다"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도다"라는 말씀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다릅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서로 비슷한 대화를 했습니다.
어찌보면 서기관이 더 깊은 이야기,
더 깊은 율법과 계명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 즉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하시고
삭개오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첫째, 깊은 앎과 통찰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간만에 대화가 되는 서기관을 만났습니다.
그 지혜와 대화의 깊이가 남과 다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질문과 대답과 대화의 내용이 깊고 예수님도 맞장구를 쳐주고 공감을 해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네 안에 있다거나
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거나
구원이 네 안에 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말과 글에 사람들이 집중하고 주목합니다.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 곧 <잘 사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천만 크리스찬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목사님이,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던 인기목사님이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목사님과 가정이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글을 잘쓰고
말을 잘하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예수님 조차도 그의 글과 말에 지혜롭다고 인정할만한 재주를 가졌지만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글과 말의 깊이와 대화의 깊이가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주목 하는 곳을 조심해야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돈이 몰리는 곳을 주목했습니다.
그러다 사람이 몰리는 곳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곳을 주목했습니다.
화려한 곳을 주목했고
세련된 것을 주목했고
잘 나가는 곳을 주목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모두 다 말하는 곳,
말 잘하는 곳을 주목합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맞이한 흐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곳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곳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혜롭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은 곳입니다.
멀지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둘째, 서기관과 삭개오는 무엇이 다릅니까?
서기관은 말 잘함(글 잘씀)으로 지혜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구원도 하나님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구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회개입니다.
말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글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회개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으로 돌아갈 때
참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은 그의 지식과 지혜로 성경을 관통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사랑의 발걸음, 사랑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다릅니다.
앎과 말은 지혜롭다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 있지는 않습니다.
멀지는 않지만 그 안에 <머물지는> 못합니다.
온 나라가 글 잘 씀과 말 잘함에 주목합니다.
아닙니다.
말 잘함과 글 잘 씀으로 지혜롭다 칭찬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를 잘라냄으로
누군가에게 <유익>이 돌아가는 <열매>가 필요합니다.
비록 말은 못하고
비록 글을 잘 못쓰지만
회개의 열매를 맺는 평범한 삶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그저 눈물 몇 방울 흘리고 하나님과 내가 죄를 해결했다는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구원의 선포,
하나님 나라는
비록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눈물 없는 삭개오의 자기 소유를 잘라내어
누군가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질문의 끝은 누군가에게 주는 <유익>이어야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를 잘라내는 힘과 능력입니다.
힘과 능력은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고
자신의 소유를 잘라내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힘이고 능력입니다.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바꾸려하고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려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도 글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를 바꾸는 힘과 능력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입니다.
* 몬스트로노스 교회 성찬식 모습입니다.
그렇게 수 없이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찬의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는 것이 성찬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우리가 먹음으로 그분과 연합한다는 것만 감격해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그분과만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과 피를 온 세상을 내어주는 삶을 통해
온 세상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되는 삶도 기억해야합니다.
나만 구원받고
나만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유를 나누고
나의 섬김을 나누고
나의 도움을 나눔으로
온 세상도 그분과 연합하는 유익을 나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잔도 떡도 많이 받으면서
내가 받은 감격만 붙잡고 살지 말고
나의 삶도
그분의 살과 피를 나눔 같이
온 세상을 위해 나의 소유도 나누는 삶으로
그들이 유익을 얻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흘러온 물이 고이면 썩듯이
내 안에 흘러온 은혜가 다시 흘러가지 않으면
그것처럼 악취 나는 것이 없습니다.
말 잘하고
글 잘쓰고
기도 잘하고
성경 많이 읽고
예배 많이 드리는 것은
성찬의 의미인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삶과
어찌보면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흐르지 않는 은혜가 있어야
기도도 성경도 예배도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흘러야합니다.
내 소유를 자르지 못하는 말과 글과 대화는
썩어가는 웅덩이의 썩은 물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