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마지막은 희생이어야 합니다. (막12:13-17)
잘못된 질문은 사람을 죽입니다.
질문은 시험입니다. 잘못된 질문의 의도는 사람을 죽입니다.
뱀은 잘못된 질문 하나로 시작되어 아담과 하와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빌라도는 질문을 잘못했습니다
"누구를 놓아줄까? 바라바냐 예수냐?"(마27:17)
살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고 죽이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살리는 질문을 하고 죽이려는 사람은 죽이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죽이려는 사람들의
첫번째 질문은 당신의 <권위>가 누구로부터 인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죽이기 위해 책 잡기 위해 다시 질문합니다.(12:7)
두 번째 질문은 가이사의 권위를 인정해야하는냐?입니다.
질문의 요지는 세금을 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입니다.
늘 질문은 <너>로 시작합니다.
너의 권위가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위 권위>입니다.
자신들의 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인정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은 늘 네가 하는 행동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시켰냐는 것입니다.
왜 이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불법을 행하고 우리의 상식에 물러가야 할 정권을 잡은 자들을 인정행야하는냐 말아야하느냐는 상위 권위에 대한 복종을 물어봅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문제가 많은데 이런 목사님께 순종해야 합니까?
인정해야 합니까?
늘 상위 권위에 대한 갈등을 질문으로 가져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답을 가르쳐줘도 절대 순복 하지 않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정답을 알면 따르겠다가 아니라
시험하여 갈등의 구조 속에 넣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정답을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나 정답을 안다고 절대로 정답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미 정답이 아니라 상위 권위에 대한 상처와 깨진 관계로 파괴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스스로도 잡을 수 없습니다.
질문의 의도가 진심으로 정답을 알면 순종하고 순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참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자신이 처한 갈등의 구조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는 <내 편>을 만들기 위한 의도된 질문입니다.
사단은 질문을 잘합니다.
질문 하나로 온 세상을 망쳤습니다.
질문의 방향은 파괴이고 죽음이지 결코 회복과 구원이 아닙니다.
질문의 의도는 파괴입니다.
흠을 잡고 시험하고 책잡으려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의도된 질문은 늘 사람을 죽입니다.
자녀에게도 흠을 찾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는 늘 의도된 질문을 합니다.
다 악한 것입니다.
의도된 질문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반대에 서 있는 것입니다.
흠을 찾아 갈등구조와 책잡을 근거가 필요할 때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한 사람들의 질문이 다릅니다.
시험한 자들의 질문은 늘 나를 세우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이려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참되고, 사람의 눈치도 안보는 쿨한 사람이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도 않고 진리를 가치치십니다. 그런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옮습니까?"(12:14)
앞에서는 추켜 세웁니다.
그러다 뒤에서 바로 갈등 구조 속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의도된 질문은 다 악한 것입니다.
질문 하나에 영혼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질문을 합니다.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을 물어보십니다.
질문은 나의 희생을 전제할 때 살리는 질문이 됩니다.
질문 속에 흠을 찾아 책망의 근거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 속에 흠을 찾아내면 내가 <희생함>으로 그 부족함과 흠을 채워줄 때 살리는 질문이 됩니다.
내가 희생하려는 의도가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흠을 찾고 책망하기 위해 질문하지 마십시오.
사단의 전략은 흠을 찾아 죽이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우리는 늘 갈등구조 속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질문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잘하느냐 못하냐?'
'어떤 목사님의 이 일이 정당하냐 아니냐?'
아닙니다.
질문의 전제는 내가 희생을 전제할 때 살리는 질문이 됩니다.
사단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과 장로들 나아가 사두개인까지 다 질문합니다.
죽이는 질문 말입니다.
질문에는 희생을 전제합니다.
자녀에게 흠을 잡고 책망 하려는 질문은 자녀를 죽입니다.
그러나 질문 속에 발견되는 약함과 부족과 결핍을 내가 채우려는 질문은 사람을 살립니다.
질문 속에 발견한 흠을 흠으로 남기면 사람을 죽이지만
질문 속에 발견한 흠을 나의 채워야 할 숙제로 남기면 그 사람은 나로 인해 사는 것입니다.
질문의 전제는 희생이어야 합니다.
질문의 전제가 흠을 찾기 위함이면 사탄과 같은 일을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질문!
천국과 지옥을 가르고
영생과 죽음을 가르고
회복과 갈등을 가르고
희생과 책망을 가르는 시작이자 전부입니다.
죽이기 위해 질문하지 맙시다.
질문!
잘 해야합니다.
* 몬스트로노스 교회 밭입니다.
지적 유희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잘하는지 그렇지 못하지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질문은 늘 내가 뭘 도와줄까를 알기 위해서 해야합니다.
교회들이 많고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습니다.
네가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가 의도이면 갈등이 생깁니다.
저는 늘 질문을 많이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도 질문 저 사람을 만나도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질문의 의도는 그 사람의 형편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질문의 결론은
"내가 뭘 도와줄까?"입니다.
몬스트로노스 마당에 밭을 만들었습니다.
사역자에게 교회가 성장하면서 '뭘 도와줄까'라고 물으니
농사를 지어 고아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밭을 갈고 경작하는데 드는 비용을 이미 다 마련했습니다.
참 장합니다.
밭을 정리하고 트렉터를 불러서 땅을 정리하고 고르는데 이미 1000랜드를 사용했습니다.
다 자기들이 헌금하고 바자회를 해서 모은 돈입니다.
그리고 필요를 물으니 씨를 사달라고합니다.
파종을 했습니다. 5가지 종류의 씨를 뿌렸고 때를 기다립니다.
질문의 열매입니다.
희생을 전제로한 질문의 열매가 이곳에 아름답게 맺힐 것입니다.
얼마든지 지원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교회를 위해 일하려고 수고하고 열정을 보이면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습니다.
질문의 마지막은 나의 희생이어야 합니다.
나의 희생 없는 질문은 결국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나의 희생을 전제로 한 질문은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립니다.
희생과 채움이 없는 질문은 결국 허무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그 사람의 흠과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