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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정답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정답은 <아는 > 아니라 <살아내는 >입니다 (11:27-33)

 

정답을 알려고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흠을 잡으려고 질문을 합니다. 답을 말한다고 화해하지 않습니다. 답을 말하면 죽이려 합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정답을 가르쳐주면 사람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이 정답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말하는 < 사람>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정답을 알려함이 아닙니다. 정답을 말하면 돌이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흠을 잡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땅으로부터인지 먼저 말하라고 합니다.

 

<> 말한다고 인생이 변하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원하여 종을 보냈습니다.

종을 때렸습니다. 번째도 때렸습니다. 그리고 번째는 죽였습니다.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포도원입니다. 종도 죽이고 아들도 죽인 이유는 포도원입니다.

예수님이 정답을 말한다고 그들이 머리를 숙이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맘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리는 인생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고

누군가 정답을 말하면 정답을 몰라서 안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살고 머리를 숙이는 인생이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함정에 빠지는 것은 정답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정답을 알면 바뀌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들은 정답을 정말 몰라서 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정답을 알아도 바뀌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답을 말하면 정답을 말하는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정답이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정답을 말한다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정답을 <말하지 않고> 정답을 <살아내야>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정답을 말하는 것에 허비하는 것보다

정답을 살아내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정답은 나의 존재의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질문한 너의 권위가 누구로부터냐는 질문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한 포도원 비유의 핵심은

존재의 이유가 하나님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됨과 가진 전부가 하나님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정답을 말하면 나의 것을 내어 놓고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포기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답이 이것인지 저거인지 논쟁을 버리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을 찾으려 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정답을 논하는데 인생을 허비하지 않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한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

세번의 종과 주인의 아들이 포도원에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답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가 가진 누림을 포기해야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불편하게 살아야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가 가진 것을 놓아야하기 때문에

사람은 정답을 싫어합니다.

정답을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합니다.

 

정답을 말하지 마십시오.

시대는 정답을 말하면

깊어지는 논란에 휩싸여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기기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답을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정답을 싫어하는 세상!

것을 포기하고 누림을 포기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정답을 말함으로 내가 정답을 사는 인생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말하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

지식은 그저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일 뿐입니다.

다들 이정표 하나씩 들고 내가 그렇게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도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정표를 들었다고 내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숙제가 남았습니다.

숙제를 안다고 숙제가 끝난 것이 아닌데

숙제를 안다고 마치 숙제를 다하고 수준이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답을 말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정답을 안다는 것과 정답을 살아 낸다는 !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따른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정답!

말하지 말고

살아내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 모잠비크의 물람보 전도사님입니다.

저희 사역은 모잠비크에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 세웠습니다.

교회는 이미 벽돌교회로 세웠고

교회는 양철교회인데 이번에 교회가 많은 부흥을 해서 건축을 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제가 모잠비크를 가지 못하기에 물람보 전도사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군데의 교회와 농장 가축사역, 농사 사역까지 교인들과 관리를 합니다.

 

많은 일과 어려운 형편이지만

삶으로 살아내는 물람보 전도사님이 귀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모습에

개월에 한번씩 보고를 하기 위해 오셔서 만나면 마음에 감동을 느낍니다.

 

정답을 알아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목숨을 다해 삶을 다해 정답을 살아내는 사역자, 그리고 인생이 있습니다.

 

머리가 숙여집니다.

닮고 싶습니다.

감동입니다.

 

정답을 말하는 많은 인생보다

어렵고 힘든 아프리카의 척박한 광야를 걷는 정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안다는 것은

나의 옷깃을 여미는 계기가 됩니다.

비록 우리가 후원하고

우리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지만

정답을 말하는 것에 인생을 보내지 않고

치열한 삶을 통해 정답의 삶을 살려는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때마다 마음을 다해 맞이합니다.

오기 전에 사모님이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보고를 하십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하십니다.

입원한 아내를 두고 길을 달려 자신의 사역을 보고하고

의논하고 기도하는 전도사님의 정답을 살아내는 마음에

가슴 찡한 감동을 느낍니다.

돌아가시는 걸음에 사역비와 교인들 선물과 가족들 선물

그리고 개인적인 마음을 담아 봉투도 전달합니다.

너무 적어 마음이 아리지만 그렇게 정답의 삶을 살아가시는

전도사님의 걸음에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채우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삶에…

정답을 말할 모르고 그저 묵묵히 정답의 삶을 걷는 걸음에…

 

하나님이여 모잠비크 교회를 축복하소서!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