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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남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남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남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  (10:1-52)

 

버림의 본질은 채움입니다.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 싫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대상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가진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질문합니다.

질문하는 자들의 마음의 본심은 시험입니다. 도움을 주고 힘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시험들게합니다. 변론합니다. 쟁론합니다. 시험하는 질문의 핵심은 버림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 번째 이야기- 이혼>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버리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느냐는 것을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버리는 것은 완악함 때문입니다. '완악함' 원어는 영적으로 <굳은 마음> 말합니다. 그럼 굳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을 말합니다.

아내를 버립니까?

육체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완악함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 인생을 남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이 완악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버립니까? 육체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살기 위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로 인생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10장의 주제는 인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 다른 인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나의 인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은 반드시 아내를 버립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일을 다시 제자들에게 설명합니다.

<간음>이라고 하십니다.

간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인생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필요는 중요한데 다른 인생의 필요는 마음에 없는 인생이 간음입니다.

 

 

< 번째 이야기- 어린아이 영접>

 

마가복음은 거듭 어린 아이를 등장시킵니다.

인생을 채우는 인생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어린 아이가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를 축복해 주기 원하여 부모가 아이를 데려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제자들입니다.

어린 아이를 데려오니 이제는 꾸짖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0:13)

 

어떤 면에서 아직 서기관들과 제자들이 같은 수준입니다.

아내를 버리는 일과 어린 아이를 데려온 부모를 꾸짖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왜요?

 

< 인생>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남의 인생> 필요를 무시하는 인생입니다.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인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살기에 다른 사람의 인생의 필요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를 버리는 이야기를 하다 어린 아이를 데려온 부모를 꾸짖는 제자들의 이야기로 연결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내를 버리는 일이나,

아이에게 축복하여 주기를 원하는 부모를 꾸짖는 일이나 같은 모습입니다.

겨우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만져 주기를 바라면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하나 만져주는 것도 인생의 필요만 보이는 인생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꾸짖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를 받들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0:1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걸었습니다.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초라한 작은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 번째 이야기- 부자 청년>

 

어린 아이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부자 청년 이야기를 하십니다.

영생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말씀을 지키라하십니다. 지켰다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인생의 필요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그게 못합니다. 심히 고민합니다.

왜요?

평생 하나님을 믿었지만 믿음의 본질이 인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생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필요만 채우는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지킵니다.

말씀은 인생에 복을 주고

축복을 주는 도구였지

어린 아이와 같이,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던 여자와 같은 어린 인생을 채우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

예수를 믿는 ,

논증 하지 않고 변증하지 않고 쟁론하지 않는 인생은

오직 나의 필요가 아니라 다른 인생의 필요가 보이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겨우 어린 아이 하나 만져 주심을 바라는 것도 꾸짖는 인생이 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세상적인 부자는 오직 한가지 입니다.

자기 인생의 필요를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부자의 끝은 자기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의 인생을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천국 가기 어렵습니다.

 

 

< 번째 이야기- 주를 위해 버림>

 

결국 베드로가 이것을 알아채고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가복음 10장의 주제를 따라오면 당연한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지 않기 위해 버리고 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모든 인생을 던졌는데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땅에서 축복과 박해를 겸해서 받습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30)

 

 

백배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박해입니다.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복을 백배나 받습니다.

그러나 박해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는 박해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자의 삶입니다.

 

축복만 말합니다. 가짜입니다.

예수를 믿는 ,

나의 필요를 채우지 않고 남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은

백배의 축복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대가는 영생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박해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정으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직장으로부터 예수를 믿는 것은 배의 축복과 박해가 같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위해 사는 인생이 각오해야 일입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고난을 말합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 하나는 좌편을 요구합니다.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왜요?

자리를 자기들도 노리고 있어서입니다.

 

자기 인생을 채우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합니다.

 

<종으로 살아라>

예수를 믿는 것은 필요를 채우는 주인의 인생이 아니라

주의 필요를 채우는 종으로 살고

남의 인생을 위해 사는 종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남의 필요> 채우는 인생이 예수를 위해 사는 땅의 인생입니다.

남들 위에서 살고

남들 보다 많이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을 포기 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고난도,

배고픔도,

핍박도 견뎠습니다.

왜요? 우편과 좌편의 자리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생에게 주시는 주님의 마지막 답은

<>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록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사는 인생을 봅니다.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은 같은 인생들을 봅니다.

 

그것에는 천국도 하나님 나라도 주님의 왕되심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필요만 채우는 <부자> 남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바디매오의 필요를 채우심>

 

다섯 가지 이야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다른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을 살라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필요를 위해 소리치는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입니다.

보지 못하던 바디매오가 소리를 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사는 제자들은 꾸짖어 잠잠하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은 초라한 인생이 소리치는 소리가 불편한 소리입니다.

아파서 죽어가고

눈물로 보내는 인생의 소리치는 아우성은 잠잠게하고 꾸짖게 해야할 대상이지

그들이 필요를 채워야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아내를 버리는 인생과

제자들과 부자 청년은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필요> 채우는 인생입니다.

<다른 인생의 필요> 무시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를 비판하고 핍박하던 인생이나

가장 가까이서 우편과 좌편을 향해 달려가는 제자들의 인생이나

모두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답은

아무도 필요를 채우지 않던 바디메오의 필요를 채워주는 종으로서의 삶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인생이 아니라

뭔가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소리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목을 놓고 고함치는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삶입니다.

 

없이 고통하는 인생은 보이지도 않고

목을 놓아 고함치며 도와 달라는 소리도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하는 인생!

 

필요를 위해 예수를 믿는 인생입니다.

 

예수를 믿는 !

천국 가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필요를 인생으로 채우고

고함치는 말고는 있는 것이 없는

세상의 많은 바디메오의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

필요가 아닙니다.

나의 손길이 필요한 인생의 필요를 인생으로 채우는 !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유치부 이성용선생님입니다.

유치부 아이들이 동전을 모았습니다.

집에 있는 동전을 모두 모아서 저희에게 전달을 해주셨습니다.

고사리 손들이 동전을 모아서 선교지에 사용해 달라고 전달해 주셨습니다.

어릴적부터 자기의 것을 나누고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다른 인생의 필요를 채우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아이들과 유치부가 귀했습니다.

작은 돈이 아닙니다. 나라 돈으로 3000랜드 한국돈으로 3-40만원의 돈입니다.

아이들이 모은, 동전으로 모은 돈입니다.

오기스교회 방과후 학교에 전달해서 책상 5개를 구입했습니다.

오기스교회 방과후 학교는 4-50명이 모입니다.

공부도 가르치고 숙제도 해주며

부모가 때문에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는데 책상이 없어 교회 바닥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감사하게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축복받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아닙니다.

가진 것을 놓고 뭔가 필요한 인생을 위해 채우는 인생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가장 가까이서 예수를 따르지만

인생의 목적이 오직 우편과 좌편 자리가 됩니다.

 

작은 것부터 내어 놓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동전부터,

가진 옷부터,

통장의 작은 물질부터 놓는 훈련을 시켜야합니다.

부자는 평생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달려왔지만

작은 동전 하나 내어놓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에

진짜 필요한 사람을 위해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만 필요를 위해 채우는 인생이 아니라

말씀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채우기 위해 지키는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교회!

제가 꿈꾸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