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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없는 인생은 자기를 알리려 하고 ...

<십자가>가 없는 인생은 자기를 알리려 하고 ...

 

 

 

 

 

 

 

 

 

 

<십자가> 없는 인생은 자기를 알리려 하고

<십자가> 사는 인생은 자기를 숨기려합니다. (9:30-37)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알려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데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감히 묻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32)

그러나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크냐>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 것을 이야기 하고 제자들이 나눈 이야기는 오직 <누가 크냐>입니다. 십자가와 반대의 개념은 누가 크냐입니다. 누가 크냐가 십자가를 불러왔습니다. 인류의 죄의 시작은 누가 크냐입니다. 세상의 개념은 오직 누가 크냐입니다.

 

누가 크냐를 그냥 말하지 않고 쟁론하였습니다. (34)

우리는 세상에 나를 알리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했고

십자가를 깨닫지도 못하고 십자가가 두려워 말도 꺼내지 못하는 제자들이

것은 누가 크냐에 대한 <쟁론>입니다.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에 현상은 <누가 크냐> 대한 열심과 쟁론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자기를 알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데 알려지는 것은 반드시 걸림이 됩니다.

십자가를 깨닫지도 십자가를 지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알리기에 바쁘고 누가 크냐를 쟁론합니다.

 

알려야 누가 큰지 비교가 됩니다.

내가 누군지 알리는 것에 교회가 앞장서고

내가 누군지 알리는 일에 목사가 바쁩니다.

십자가와 상관이 없어서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자인지, 누가 첫째인지 말씀합니다.

 

 

첫째, 첫째 되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어린 아이(형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9:35)

 

어린 아이입니까?

알려지지 않아서입니다.

표시가 나지 않아서입니다.

높아질 근거가 없어서입니다.

 

십자가는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는 알려지면 십자가를 지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논리와 이성과 합리로 우리를 결박합니다.

 

모든 것에 자유로운 것이 알려질 근거가 없는 <어린 아이> 섬기는 것입니다.

 

알려지면 내가 만나는 사람은 자들이 됩니다.

이름이 나면 내가 대하는 사람은 어린 아이들이 아닙니다.

점점 유명하고 이름 있는 사람이 나의 고객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십자가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지길 원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누가 크냐의 논리에 내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

모든 죄의 사람의 본성은 누가 크냐에 묶여 있습니다.

 

알아봐 주는 것이 좋고

이름 하나 대면 ~누구하는 하는 유명세가 좋습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자신을 알리지 말라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지는데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그들의 모든 말의 이유는 <누가 크냐>입니다.

누가 크냐를 벗어 버리는 길은 이름 없고

알려질 염려 없는 어린 아이를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체질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한국 사람의 체질은 사역을 잘하고 잎이 좋은 놈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자기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고 (?) 보이는 선교사나 목사님을 많이 후원합니다.

 

공부도 하고

능력도 있고

사역의 열매도 많은 선교사에게 저절로 눈이 가고 후원도 합니다.

처음부터 하면 괜찮은데 점점 이름이 알려지는 사람에게 사람이 몰립니다.

 

<누가 크냐> 정신입니다.

정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첫째가 되는 길을 예수님은 제시하십니다.

 

쟁론이 아니라 눈에 차지 않는 어린 아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끝이 되라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아니라

존경 것도 없고

말할 근거도 없는 어린 아이 같은 끝에 있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체질적으로 우리는 부실한 놈을 실어합니다.

아니 누가 크냐라는 개념으로 그런 부실한 놈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교를 하다보니 많은 사역자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사역을 잘하는 친구에게 마음이 갑니다.

뭐라도 하나 주고 싶습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크냐의 개념에서 나오는 우리의 실수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주목하고 집중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어린 아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사람이 되려면 작고 초라한 사람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능이 주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작은 자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잘하는 하나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비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부모는 잘하는 놈도 이쁘지만 못하는 놈이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가 예수님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알려지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유명해 지고 내가 커지는 것을 포기한 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알리려 하는 것은 누가 크냐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섬기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님은 작은 아이들의 삶과 함께 있기에

어린 아이 하나를 섬기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높고 커지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작은 어린 아이

작은 소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초라한 인생이 찾아오고 병든 자들이 가까이서 소리를 지르며 도와 달라하면

예수님께로부터 떨어뜨렸습니다. 누가 크냐를 위해 사는 인생은 초라한 인생은 걸림돌이지 섬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작은 자가 보이고 <> 자가 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은 눈물의 인생을 찾으셨고

왕으로 살고 싶은 제자는 누가 크냐를 위해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쟁론합니다.  

 

누가 크냐를 위해 쟁론하지 말고

눈에 띄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인생인 어린 아이 같은 인생을 섬기는 !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인생은 자기를 알리려 하고

<십자가> 사는 인생은 자기를 숨깁니다.

 

 

 

 * 교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입니다.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사며 발은 보이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 였습니다.

우리는 손도 발도 없으면서 얼굴만 알리려 합니다.

작은 하면서 알리고 싶습니다.

내가 크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알리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자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입니다.

 

얼굴 없는 발과 !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