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나를 믿고 <기도>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막9:14-2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직 변론만 넘치는 세상입니다.
변화된 예수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변론으로 풀려는 변론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변화산의 거룩한 영적 충만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시내산의 거룩한 영광은 없습니다. 내가 내려온 것은 사람들의 변론만 넘치는 세상입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9:14)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초막 셋을 짓자고 한 것입니다.
(변론으로 넘치는 세상)
<변론>이란 말은 '논의하다', '헐뜯다', '요구하다', '질문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직 질문과 헐뜯음과 요구만 넘쳐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변화된 주님과 엘리야와 모세를 만난 거룩한 영광은 없고 오직 왜라는 질문과 내 아이가 귀신이 들고 그것을 고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헐뜯음만 넘쳐나고 요구만 넘쳐나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변화산에서 내려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책임전가)
말 못하는 벙어리 귀신된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온 아버지는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 앞에서 헐뜯습니다. 우리 아이가 낫지 못한 이유는 당신들의 제자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파서 온 아이가 낫지 못한 것이 제자들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병의 원인이 아니라 병의 원인과 그 동안의 한을 모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이제 헐뜯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자 자기 아들을 고치지 못한 문제를 은근히 지적합니다.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 교회의 문제, 시대의 문제가 꼭 누군가의 문제 갔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고, 내 아들이 이렇게 고통중에 있고, 내 신앙이 이런 문제가 있고, 우리 교회가 이런 문제가 되는 것이 꼭 저 목사 때문에, 저 담임목사 때문에 저 사람 때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나타나면 그 누군가를 향해 나의 아픔의 이유가 저 사람이라고 헐뜯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죄의 속성입니다. 죄의 속성은 늘 저 사람을 탓합니다. 나라 꼴이 이렇게 되고, 교회 꼴이 이렇게 된 것이 꼭 저 사람 때문인것처럼 말합니다. 저 교회가 이런 일을 해서, 저 목사가 이런 일을 저질러서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은 죄의 속성인 책임전가와 나의 문제의 근원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방주부터입니다.
방주 안에 거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나의 이 문제가 저 제자들의 문제라고 헐뜯는 귀신들린 아버지의 말속에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어찌 이 아들이 병에서 낫지 못하고 고치지 못한 것이 제자들 탓입니까?
(예수님의 진단1- 믿음 없음)
자신의 문제의 책임을 전가 시키는 귀신들린 아버지(세대)에게 예수님이 던진 진단이 뭔지 아십니까? 제자들이 아닙니다.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대를 책망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9:19)
<믿음 없음>입니다. 예수님의 귀신들린 아버지를 진단한 것은 <믿음 없음>입니다. 아들 고치지 못한 문제를 겉으로 보기에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고 진단한 것이 아니라 이 세대를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세대입니까?
믿음 없는 세대입니다.
믿음 없는 세대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책임 전가>입니다.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나의 교회 안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이 어떤 제자들,
어떤 목사들,
어떤 장로들의 문제로 해석하고 그것에 관해 변론합니다.
질문하고 질책하고 요구하고 헐뜯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대한 진단을 이 세대라고 하시며 이 세대의 믿음 없음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분명이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이 맞는데…
분명히 제자들이 능력이 없어서,
분명히 제자들이 자기의 직분에 맞는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것이 맞는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책망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하고 도리어 화를 내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변론과 질문과 요구와 헐뜯음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 교회가 나라를 망치는 것 같습니다.
저 목사가 교회를 죽이는 것 같습니다.
저 목사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주님은 그것이 믿음 없는 일이라고합니다.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도 믿음 없음이고
믿음이 없으니 그 책임을 제자들에게 전가하고 질문하고 요구하고 헐뜯는 것도 <믿음 없음>입니다.
우리는 늘 제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군중, 무리의 자리에서 제자를 판단합니다.
제자는 책임을 지고 그 일을 고치려하는 자이고
무리와 군중은 늘 변론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무리와 군중이 아니라 이 일에 책임을 지는 제자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해결책2- 기도의 사람)
주님은 제자들이 왜 이런 종류들이 나가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오직 <기도>라고 답하십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9:29)
이런 종류는 이런 악한 영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악한 영이 든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악한 영이 든 사람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합니다.
즉 귀신들려 말 못하는 아들과 함께 그 악한 영의 생각에 변론으로 채우는 인생,
나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믿음 없는 세대도 포함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변론에 싸여 살게 됩니다.
변론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늘 변론만 하는 사람을 봅니다.
늘 변론에 인생을 거는 사람을 봅니다.
내가 맞느냐 네가 맞느냐?
이 문제가 너 때문이다.
이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이 목사 때문이다.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은 이 교회 때문이다라고 변론만 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거대담론도 좋습니다.
시대를 걱정하는 마음도 좋습니다.
바르게 하고 싶고 바르게 세우고 싶은 마음도 좋습니다.
누구의 책임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바르게 잡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지막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걱정이 되고
그렇게 그 목사가 걱정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사랑한다면
우리 기도하면 안되겠습니까?
우리 금식하면 눈물로 주님께 나아가면 안되겠습니까?
기도 외이는 이런 종류가 나가지 못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왜 여전히 변론과 질책과 요구와 헐뜯음으로 우리의 아까운 인생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 돌아봐야합니다.
기도 외에는 질책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악한 영은 한 아이를 귀신에 들려 말을 만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의 마음에 책임을 전가하는 변론의 인생으로 몰아 넣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시대는 악한 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지 않고 변론으로 인생을 보내는 무리와 군중입니다.
우리는 제자입니다.
기도해야하는 제자입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하자
그 일에 더 회의 하고 논의하고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곳에 변론이 넘쳐납니다.
변론의 결론은 나의 희생이어야 그것이 바른 변론입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변론은 사람을 죽이고 악한 영이 더 우리를 조종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기에
본능적으로 변화산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산 밑으로 내려 가자고 하십니다.
이유는 주님은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변론>을 그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기도의 끝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는 희생의 기도의 사람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변론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희생하기 위해,
자기를 내어주기 위해 기도에 생명을 거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내려오면 우리는 변론에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신 제자의 삶!
기도의 사람입니다.
* 오기스교회의 성경캠프에서 기도하는 아이입니다.
오기스교회는 이제 스스로 자체 교회에서 일년에 두번 성경캠프를 합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간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가 몇번의 섬김을 통해 그들이 배워서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지만 삶으로 모범으로 모범을 보이면 그들이 배웁니다.
말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의 모범이고 삶의 모범입니다.
말하지 말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말은 나를 믿고 기도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변론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길!
기도입니다.
나를 변론의 인생에서 건지는 길!
오직 기도입니다.
고통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
오직 기도입니다.
믿음 없음을 치유하는 이 세대를 향한 명약!
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 외에 전부를 다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아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