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결정 (막9:11-13)
약 400년을 기다렸습니다.
영적 암흑의 시대를 지나며 그렇게 기다리던 엘리야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진짜 엘리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의 심정과 사역을 감당했던 세례요한 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이 기대한대로 세례요한을 대했습니다.
(잘못된 엘리야 관(觀))
즉,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엘리야 즉 세례요한을 대한 것입니다.
함부로 대했다는 원어는 <기울어지다>는 말과 <결정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던 엘리야에 대한 기울어지게 결정한 상태에서 세례요한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수백년을 서기관들이 연구하고 기다리던 엘리야가 왔는데 사람들은 함부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수백년을 연구하고 기다리는 엘리야에 대한 자기만의 기울어진 결정으로 그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 대한 자기만의 기대, 자기만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엘리야가 왔으되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9:13)
물건을 하나 찾아도 내가 찾고 있는 물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찾으면 내가 원래 찾고자 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찾아도 같은 종류의 차지만 찾아야 하는 것은 빨간 차지만 내가 흰 차라고 생각하고 찾으면 결코 찾아야 하는 빨간 차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메시야 관(觀))
인류가 타락을 하고 수 천년을 기다렸습니다. 죄악의 시대를 지내며 인류의 메시야를 세상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흰색 차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같은데 그 모양이 빨간 차로 찾아 오셨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같지만 색깔이 다르니 사람들은 메시야를 고난당하게 하고 죽여버립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서기관들, 대제사장들, 장로들은 다들 기대하던 색깔이 있습니다.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자기들이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엘리야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울어진 마음으로 결정하고 보면 색깔만 바뀌어도 내가 찾고 기다리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메시야의 공통점)
이스라엘이 생각한 엘리야는 온 나라가 다 존경하고 선지자 중에 선지자 였습니다. 850대 일로 거짓 선지자들과 싸우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서기관들 장로들 그리고 대제사장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것만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가 왔습니다. 그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일반 사람들과 함께 지내지도 않고 말씀을 잘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고 이상한 벌레인 메뚜기를 먹고 돌 사이를 뒤져서 석청을 먹고 삽니다. 무슨 약초꾼도 아니고 시대를 저버린 사람도 아니고 이상한 누더기를 뒤집어 쓰고 광야에서만 지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기대한 엘리야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혀 그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는 것은 오직 회개하라고 외칠 뿐입니다. 화려한 설교, 세상이 놀랄만한 설교도 없습니다. 그저 요단강에서 세례나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서기관들, 장로들, 대제사장들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바라던 그 엘리야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요한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엘리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메시야가 올 때 나타날 일들을 놀랍게 기록합니다. 해방을 시켜주고 자유를 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에 대한 그림을 가슴속으로 그리고 인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메시야가 왕의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인생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말구유에 누웠고 쫓겨 다녔고 아무도 관심없는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선한 것이 없는 곳입니다. 나이 30 될 때까지 눈에 띄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겨우 어릴적에 한 두어번 성전에서 사람들과 성경에 대해 대화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 서기관, 장로들, 대제사장의 눈으로 보면 이건 메시야가 아니라 동네 이장도 못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기다리던 엘리야와 메시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성경을 너무 잘 알아서 엘리야의 권능,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임할 것을 기대하고 결정하고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울어진 결정으로 대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함부로> 대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반복되는 것)
예수도 믿고 성령도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가 잘못되고 기울어진 결정으로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예수님이 생각한 믿음이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믿는 믿음은 기울어지고 잘못된 결정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생각한 예수를 위한다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로 찾아온 세례요한을 잘못 대한 것은 한 두사람의 기울어진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로 찾아온 예수님을 잘못 대한 것은 한 두 사람이 임의로 대하고 함부로 대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의 성도가 기대하고 바라는 예수 믿는 그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나는 어떤 엘리야를 기대했을까?
하나님이 기대하고 보낸 엘리야와 내가 기대하는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그 가운데 나는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나는 어떤 메시야를 기대하고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믿으라고 보낸 예수님과 내가 기대하고 믿는 예수는 다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하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온 교회와 성도가 다 가는 예수를 믿는 길이
예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엘리야가 먼저 왔지만 성경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은 함부로 대우하였고
메시야가 왔지만 성경을 그렇게 연구하고 잘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다 이 세상의 눈,
이 세상의 관점,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엘리야도 안보이고 메시야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흰차를 기다립니다.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빨간 차를 보내셨습니다.
평생 내 안에 평강도 없고 평안도 없이 사는 것!
혹 하나님이 보낸 빨간 차가 아니라 흰 차를 붙들고 살아서 그런건 아닌지
오늘도 조심히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은 빨간 차를 보냈고
우리는 흰 차를 평생 찾고 있다면…
모든 백성들이 바라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잘 알던 전문가들이 생각한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 성령에 대해서도 우리는 흰 차로 기대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빨간 차를 보냈는데 여전히 흰 차를 기대하며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 시대나 성경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기울어진 결정을 가지고 평생 흰 차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성경은,
성령은 빨간 차를 보냈는데 말입니다.
나는 흰 차를 찾는 건 아닙니까?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울어진 결정>이 엘리야도 죽이고 메시야도 죽입니다.
나에게 기울어진 결정은 없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에서 말입니다.
* 몬스트로노스교회에서 개척 후 처음으로 세례식과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보통 연합 부활절 집회에서 함께 세례식을 했는데 오늘이 이 교회 자체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총 23명의 유아와 어른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넘쳐납니다.
잔치를 준비하고 온 성도가 함께 축제를 했습니다.
개척 후 첫 시간이라 샘목사님도 초청을 해서 같이 진행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미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주술과 무당과 샤마니즘으로 혼합된 기독교이기에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다들 기적과 신비를 추종하고
주술과 조상신 숭배가 생활화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참 믿기 어려운 분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주를 자신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리는 고백은 참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혼합종교 속에서
주술과 샤마니즘, 조상신 숭배가 강한 아프리카에서
이들의 고백이 오늘은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변하지 않고 진리안에서 잘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하게 이 교회는 교회당이 작아졌습니다.
의자도 모자랍니다.
화장실도 다시 지어야 합니다.
교회도 증축을 해야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방학에는 또 하나님의 일들이 여전히 많을 것 같습니다.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