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드리는 최고가 예수님께 최악입니다 (막9:1-13)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변화산에서 초막셋을 짓고 예수님을 위해 엘리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 제자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 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직접 경험했습니다. 내 손을 빵을 나누어주고 내 손으로 물고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칠병이어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먹고 남은 광주리가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입니다. 내 눈 앞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내고 귀먹어리 벙어리들이 고침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의 실수도 용납하고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든 손을 씻지 않고 먹든 늘 제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변화산에서 오직 세 사람의 제자만 데리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변화되신 예수님도 보여주었습니다.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내가 내 손으로 기적의 손이 되고 뭔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오해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일들이 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들이라고 고집을 부릴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다 맞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말하게 됩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변화의 시간, 특별한 만남의 은혜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베드로입니다.
첫째, 우리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해서 칭찬을 듣고 천국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위한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 속에 우리가 원하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해야 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은 교회와 나를 이렇게 대해야 하는 말 그대로 내가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우리의 실수는 늘 내가 그리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그리는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되고 고난을 당해서도 안되고 당당하게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고 죽지 않고 살아서 세상에 그 이름을 증명해 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계획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변화되신 예수님,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짓자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계획입니다. 당장 예수님이 좋아하실 것 같고 그렇게 대접을 해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는 계획은 늘 그렇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의 계획은 예수님이 원하는 것과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영적 깊이를 누리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은혜를 누리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예수님이 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전혀 상관 없는 삶과 계획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베드로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주를 위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 고백으로 주님께 칭찬을 얻었지만 그가 원하는 예수님의 길은 예수님이 원하는 예수님의 길과 전혀 다른 길입니다.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살리자는 말이 예수님을 진짜 죽이는 길입니다. 죽으로 가는 예수님을 살리자는 것이 예수님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이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마음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초막을 짓고 엘리야와 모세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들이 좋은 삶을 살도록 하자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원히 죽이는 길인 것을 가장 가까이 예수님을 수종 드는 베드로가 생각한 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영원히 죽이는 길을 권하고 택하고 계획하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 난 소리가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해서,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하지만 그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과 다른 주의 사랑하는 백성을 위한 대안은 바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오직 하나를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9:7)
우리의 실수는 내가 살아온 삶의 스타일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다 다릅니다. 다 색깔이 다르고 삶의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자기 방법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교인이 열명이면 열명의 방법과 계획이 나오고 천명이면 천 가지 방법과 계획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는 우리에게 그 해결책을 주십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입니다.
내 생각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내 스타일로 일을 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오다 보니 하나님이 계획과 하나님의 길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길, 세상적으로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 놓으신 우리를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을 이 땅에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이는 길입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왕으로 삼고, 초막을 짓고 이곳에서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하는 길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께 가장 악한 길이 되는 길입니다.
왜 그럴까요?
넷째, 예수님의 길은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면서 그제야 말씀합니다.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은자 가운데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 놓으신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한번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까?
예수님이 한번 죽으셨으니 나는 다시 안 죽어도 되는 것이니까?
아닙니다.
하늘에서 전한 소리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번 죽으셨지만 우리는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예수님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길,
세상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길은
악한 세상을 향하여 비판하고
정죄하고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가장 많은 표적을 보고
가장 가까이 예수님을 본 베드로의 거듭되는 실수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가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길>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세상을 위하는 길은 예수님을 왕 자리에 앉히기 위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하는 길은 초막을 짓고 화려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위하는 길은 예수님이 편안하게 살도록,
예수님이 세상에 대접 받고 교회가 대접받고 교회가 세상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위하는 길은
오직 <자신을 내어주는 길>입니다.
교회를 위한다면서,
예수님을 위한다면서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길을 갑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 자신을 내어주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내가 세우는 초막과 장소에서 거하기를 바라는 계획을 세우고
내 인생의 영광을 주님이 받기를 바라는 기도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 자신을 드리는 드림의 삶이 없습니다.
왜 베드로가 하는 말마다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고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과 반대의 길이었습니까?
진정 예수를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길은
세상에서 최고의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 자신을 내어드려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모든 거룩한 경배,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모든 거룩해 보이는 예배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작은 것이라도 희생하지 않는 모든 계획과 영광은
다 사탄이라고 이야기를 듣고 거짓 선지자라고 이야기를 들을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가장 가까운 베드로,
가장 기적을 많이 경험하고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신 베드로도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하니 초막을 짓자고 여기서 살자고 합니다.
다 예수를 위하는 말입니다.
그 진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중심이 가짜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하려합니다.
아닙니다.
자기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하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붙들고 고난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항변했던 베드로,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영광가운데 살라고 말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오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고백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봅니다.
중심으로 드리는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과 최고의 대접이 예수님이 가려고 하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은 아닌지,
두렵고 떨기기까지 합니다.
다른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놓친 것은 예수님이 가려고 했던
<자신을 내어주는 길>과 반대의 길을 늘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내어 주지 않는 모든 거룩한 행위는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모든 주를 위한 계획은 무시 당합니다.
오직 하늘의 소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그릇 행하여 잘못된 길을 가기에
오직 그분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고 길이 되기에
하늘의 소리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십니다.
말씀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믿어오던 방법과 최고의 대우를 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최고의 대우는 날마다 내 생각과 스타일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분께 들은 음성으로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내어주는 길>이 아닌 모든 것은 예수님의 길과 반대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그런 사람,
비록 큰 일은 못하고
비록 큰 영광은 아니어도
그저 그분이 가는 길에 함께 걸어가는 <작은 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이라크전도 입니다.
주를 위해 큰 꿈을 꾸기도합니다.
놀라운 영광을 돌려드리고도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욕을 먹고
예수님이 세상으로 지탄을 받고
예수님이 힘든 길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다 말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어서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예수를 믿고 따르고 섬기면서도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왕 됨,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하는 그 제자가 마음 아픈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세상이 나를 향하여 뺨을 치고
세상이 나를 향하여 고난을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오래 나를 알아온 나의 제자들이 내가 가를 길을 모르고
자기의 길만을 가는 것이 더 마음 아픈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사탄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사단이라는 소리를 베드로가 들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예수님을 잘 아는 제자가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영광을 말하고 의로운 싸움을 하고
초막을 짓자고 말하고
어떤 것을 해도
주님과 상관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실 주님의 경고가 생각이 납니다.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노라"(마7:23)
이들의 실수는 불법입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과 놀라운 일을 해도
자기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법을 알지 못하면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나를 돌아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길을 달려왔는지…
오직 그것만이 주님의 길임을 알기에…
오직 두려움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