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고민은 <결핍>이 아니라 <누룩>입니다 (막8:11-38)
우리의 고민은 내 손에 없는 것입니다.
<결핍>입니다. 우리의 간구는 늘 우리의 결핍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경고한 것은 누룩입니다.
우리는 결핍을 고민하고 주님은 <누룩>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첫 번째 대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오병이어로 오천을 먹이고, 칠병이어로 사천을 먹인 기적이 있어도 세상은 늘 자격을 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에 맞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표적으로 그 마음과 영혼이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늘 자격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담임목사로, 교수로… 모두 그 직분에 맞는 자격을 원합니다. 목사는 슈퍼맨인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표적을 보여줘야 담임목사가 됩니다. 학위가 남달라야 하고 사역의 열매도 뭔가 증명을 해야 합니다.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자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인정을 합니다. 어느 곳에 어느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이 있어야 하고 자격을 보여줘야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표적을 한번 보여주면 되는데 늘 보여달라고 합니다. 계속적으로 당신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힐난하며 시험하는 말입니다. 자격이 문제가 아니라 힐난하고 시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대화>
제자들이 갑자기 떡이 없다고 합니다. 칠병이어로 남은 일곱광주리를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대화 후 배에서 경고하시며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빵을 두고 와서입니다. 서로서로 수군 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언성이 높아진듯합니다. 그것을 아시고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오병이어로 오천, 칠병이어로 남자만 사천명을 먹인 일을 기억하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은 누룩을 조심하라하는데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고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에 인생을 집중합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나의 결핍에 집중합니다. 오직 그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룩을 조심해야한다고 하는데 그들은 빵이 없음을 고민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여지는 이유는 우리는 늘 우리의 <결핍>에 인생을 집중해서입니다.
나는 무엇이 없고,
나는 무엇이 필요하고,
나는 무엇을 채워야하고
나는 무언가를 더 가져야하고 하는 것이 다 우리의 <결핍을 채우는 인생>이어서 그렇습니다.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경험해도 오늘 당장 나의 결핍이 인생의 주된 관심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기적을 많이 보고 은혜를 보고도 아직도 너희가 누구와 같이 있는지 모르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결핍>을 보지 말고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결핍은 우리가 채우지 못합니다.
인생의 결핍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핍에 집중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고 보여주시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마음만 둔하여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핍을 채우지 못합니다.
평생 채워도 오늘 다시 결핍을 보는 것이 인생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분으로 늘 옆에 계시고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고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누룩입니다.
누룩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누룩이 무엇입니까?>
결핍보다 조심해야 할 누룩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세속적 방법입니다.
첫째, 자격을 구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늘 자격을 요구합니다. 당신이 어떤 자리에 있다면 당신의 자리에 맞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룩입니다. 세상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은 늘 자격으로 말합니다. 표적으로 말합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않으려면 당신의 자리에 맞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말하면서 시험한 것과 동일합니다. 세상은 당신의 자리에 맞는 표적을 보여야 내가 믿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누룩입니다. 누룩 자체는 악으로 상징되는 말입니다. 작은 악이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유월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습니다. 이 누룩이 주는 상징은 자격을 원하는 세상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세상에 악이 왔습니다. 그 세상에서 살면 이 세상의 영은 늘 우리에게 자격으로 말하려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이 놀랄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세상의 누룩입니다. 목사라면 목사로서 자격을 세상은 원합니다. 세상이 놀랄만한 표적, 세상이 와~할 열매, 세상이 인정할 말한 자격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누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자격에 맞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님이 주신 표적은 오직 <자신의 죽음>입니다.
<누룩>의 반대는 <자신의 죽음>입니다.
누룩은 자격을 원합니다. 그 자격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우리는 사역을 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격을 보여주는 표적을 보여도 믿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를 위한 표적은 오직 자신의 죽음임을 말씀하시고 다시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표적을 보여준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유혹에 빠집니다. 뭔가를 보여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뭔가를 보여주지 말고 그냥 십자가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8장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과 함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이 죽겠다고 하니 절대 안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단호히 말합니다.
"사탄아"
베드로가 사탄이 되는 순간입니다.
왜 베드로가 사단이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이 세상이 원하는 주님으로 자격을 보여주고 표적을 보여주고 기적을 보여주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누룩의 반대인 십자가를 말하자 절대로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탄입니다.
세상의 사상과 세상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 사상과 방법은 자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우리의 자격을 증명하려 합니다.
목사의 자격,
선교사의 자격,
장로의 자격,
예수 믿는 자의 자격을 표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이정도 내가 일을 했다,
내가 이정도 열매를 만들었다,
내가 이정도 자격은 된다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기 위해 살아갑니다.
온 성도도 그런 목사를 원하고
온 목사도 그런 성도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자격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십자가를 가려는 주님을 말리는 베드로는 사탄입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합니다.
<누룩>의 반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증명하지 말고 자기 목숨을 나와 복음을 위해 잃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표적을 구합니다.
그럴듯한 열매와 그럴듯한 자격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입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결핍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는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다 여깁니다.
그것이 <누룩>입니다.
평생을 그 자격을 얻기 위해 돈을 벌고
평생을 그 자격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평생을 그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땀 흘립니다.
그것이 사탄입니다.
그것이 누룩입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격이 먼저고
세상에 나를 증명하는 것이 먼저고
세상이 인정하는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8장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8:38)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자격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자격을 증명하지 말라는 이것은 부끄러워합니다.
자격 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입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자격을 위해 살아가는,
자격을 얻고 자격을 증명하고 자격을 구하는 세상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믿고 살아가는 자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격을 위해 표적을 구하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담임목사와 내가 바라보는 직분자들에게 자격을 구하지 않고
오직 복음과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인 것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살지 않기에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마지막 영광으로 올 때라는 말까지 하시면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한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그리 중요한 말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고 거룩한 천사도 언급합니까?
누룩입니다.
사탄입니다.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살며시 들어온 누룩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여 알지 못합니다. 부끄러워하는 그것! 그것이 누룩입니다. 우리 목사는 적어도 이정도 학위가 있어야하고 우리 목사는 적어도 이정도 설교는 잘해야하고 우리 목사는 이정도 수준은 되야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복음과 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인지 먼저 확인해야합니다. 그것 확인하지 않고 구하는 모든 자격은 누룩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증명할 나의 자격을 얻기 위해
돈을 벌고
자격을 구하고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누룩으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8:12)
우리는 우리의 <결핍>에 목숨을 걸고
주님은 <누룩>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이 다시 오는 날까지 걸었습니다.
결핍입니까 누룩입니까?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진정한 고민은 <결핍>이 아니라 <누룩>입니다.
결핍은 채움으로 해결되지만
누룩은 죽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룩은 인류가 걸린 심각한 중병 입니다.
* 흑인들의 잔치 식사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됩니다.
먹지 못하는 자들은 그냥 배를 채우면 됩니다.
그러나 결핍보다 중한 문제는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온 누룩입니다.
있는지도 모르고 없는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사고 구하는 것!
자격입니다.
그 자리에 있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이 정도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이 정도여야 되고
장로는 이정도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세상적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고 부여주시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
그것이 우리의 자격이 되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도 걸고
거룩한 천사도 걸고
마지막 날도 걸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기준입니다.
결핍에 인생을 걸지 말고
누룩에 인생을 거십시오.
자기 부인과 십자가!
우리를 살리는 마지막 대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