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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회복이 됩니다.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회복이 됩니다.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회복이 됩니다  (7:24-30)

 

평범한 문제 가운데 예수님의 고침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으로부터 결론적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골짜기와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늘 두로에서 만난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입니다. 유대인과 상종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개라고 표현을 했고 유대인들을 먼저 돌봐야 하기 때문에 고칠 없다고 표면적으로 표현하신 사람입니다.

 

여인이 만약 딸이 문제가 없고 인생의 아픔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당시에 몇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유일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은혜를 경험한 것은 여인이 경험한 인생의 바닥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엄마에게 가장 인생의 절망은 자녀의 아픔입니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처절한 눈물과 아픔을 경험하는 것이 자녀의 아픔입니다. 아픔이 여인을 이념과 사상과 인종의 벽을 넘어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게 것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소리는 정말 나아가야 진리의 앞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1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하나님을 부른 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6-7살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아팠습니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며 아파 넘어지는 어머니를 것입니다. 그날 저는 내가 알지도 못하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어머니를 살려주시면 내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어떤 하나님이든지 어머니를 살려 달라했습니다. 어린 6-7살된 어린 아이지만 철저한 불교 집안이었지만 어머니의 아픔 앞에서 현실을 넘어 초월의 존재인 하나님을 부르게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

 

헬라인으로 예수님 앞에 나온 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개라고 비유하며 너를 돌아 없다는 소리에도 자존심 내려놓고 유일한 희망을 붙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고 세상에는 소망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지막 기회, 마지막 소망이라는 것을 그녀의 살아온 인생 경험을 통해 알았습니다.

 

<소망 없음> 우리는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천국 가는 구원 열차는 인생의 <소망 없음> 대한 철저한 자기 인식입니다. 구원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 남들보다 한다고 생각하는 의인의식 속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는 경험할 없습니다.

 

소문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앞에서 그분이 흘리는 부스러기라도 인격적으로 대화를 통해 얻는 만남은 오직 인생의 소망 없음의 고백 속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시대가 발전 수록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는 사라집니다. 인생이 꽃이 필수록 예수님을 소문으로 수는 있지만 인격적으로 그분의 앞에 엎드리어 그분의 소리를 드는 것은 드물게 되는 것입니다.

 

발전이, 성장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소문으로 아는 자들에게 성공과 출세와 돈과 능력은 소문이 영원히 인생에 소문으로 머물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자녀의 아픔, 자녀의 고통, 인생의 소망 없음을 아는 인생은 여러가지 장벽으로 닫혀있던 그분을 향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 없이 인생의 목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절박하고 소망 없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난 사람들 이었단 사실에 오늘은 위로를 얻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소망 없는 인생들을 만나시는 일에 자신의 모든 하루를 사용하십니다. 두로 지방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7:24)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었지만 여인의 사랑하는 딸로 인해 그녀를 예수님의 앞에 엎드리게 만들었습니다. 평범한 인생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평범함은 우리를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머물게 가능성이 많습니다. 평범함 속에 인생의 소망 없음을 깨닫는 것도 은혜이고 각자 처한 인생의 절망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의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아픔 가운데 확인 하시는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오직 주님 만이 인생의 답인가?"

그래서 자존심,

물질,

시간,

가진 것을 내려 놓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를 위해서 말입니다.

 

아직 인생에 소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존심도 조금만 내려 놓습니다. 물질도 조금만 내려 놓습니다. 시간도 조금만 내려 놓습니다. 가진 것도 조금만 내려 놓습니다. 아직 인생이 소망이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거기에는 소문으로 아는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소망 없음을 아는 인생은 전부를 걸게 됩니다.

전부입니다.

 

인생의 절망에서 희망의 꽃은 피어나지만

오직 주님만이라고 고백하는 곳에 희망의 꽃은 피어납니다.

 

절망 가운데,

눈물 골짜기 가운데 있는 모두가 주님만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몇 명의 사람만 인격적인 주님 앞에 만남이 허락되어집니다.

 

절망이 있지만 다른 곳으로 가는 인생도 많습니다.

다른 곳에는 답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앞에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야합니다.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

 

"그래 네가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29)

 

주님이 원하는 답을 하여야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답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고백을 우리는 주님이 나의 답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나오는 !

주님이 원하는 답을 말해야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고백을 드러야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이 기뻐하는 답을 하였습니다.

여인이게 답은 자존심입니다.

개들에게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는다고 말한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입니다.

주님이 여인에게 확인한 것은 <내려놓는 자존심>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입니다.

<자존심> 내려 놓아야 회복하게 됩니다.

 

각자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것들이 있습니다.

내려 놓고 고백해야 한가지가 있습니다.

고백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자존감 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각자 주님 앞에 고백해야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고백을 넘어야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고백은 무엇입니까?

 

 

 *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언어를 배울 빨리 습득하거나 늦게 습득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언어를 빨리 습득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이 강하면 언어를 빨리 배우지 못합니다. 외국에서 살면서 자존심이 강할수록 언어 습득 능력은 떨어집니다. 물론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언어는 자신이 뭔가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자주 물어야 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묻지 않습니다. 모름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내가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발전할 없습니다.

 

사역자가 사역을 제대로 하려면 가지가 필요합니다.

완벽하든지 정직하든지 입니다.

모든 사역을 완벽하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완벽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너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직하려고 합니다.

완벽하지도 않은데 정직하지도 않으면

사람들은 앞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웃습니다.

아니 웃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속이 없어야 하나 봅니다.

 

약함이 능력이 되는 것은

자존심을 주님 앞과 사람 앞에 정직하게 내려 놓을 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만난 이유입니다.

 

사람을 만날 ,

사람과 깊은 자리로 나아갈 걸림돌은 자존심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못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합니다.

못했다 말을 못합니다.

감사하다 말을 못합니다.

못이다 말을 못합니다.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딸이 아프지 않고 인생의 눈물 골짜기를 지나지 않아도

놓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풍성한 은혜가 많을 것입니다.

 

<자존심> 지나야 <자존감> 회복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