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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같은 인생을 바꾸셔서...

가시 같은 인생을 바꾸셔서...

 

 

 

 

 

 

 

 

 

 

 

가시 같은 인생을 바꾸셔서... (7:1-23)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본능적으로 찾아냅니다.

잘못을 찾아내는 본능은 첫째는 내가 의롭고 정답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견제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나는 너보다 잘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너처럼 나쁜 짓은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파견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몇일 관찰을 해보니 바로 문제를 찾아냅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일입니다. 당시  유대 전통과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유대인들은 반드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통이고 유전입니다. 이것을 전문가 집단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문제를 찾아냅니다. 당신이 아무리 놀라운 일을 해도 당신들의 제자들이 이런 전통과 유전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외식>입니다.

너희는 외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7:6)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이 세운 전통과 유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나를 허되이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7:9)

 

예를 들어 집에 아이가 셋입니다. 셋에게 과자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과자를 먹는데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가 거실 청소를 했는데 과자를 그렇게 흘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울기 시작을 했습니다.

 

과자를 이유는 아이가 서로 사이 좋게 즐겁게 놀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과자를 흘린다고 혼을 내기 시작을 합니다. 엄마가 과자를 의도는 온데간데 없고 과자를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새로운 법이 탄생한 것입니다. 새로운 때문에 아이들이 싸우기 시작하고 서로 미워하기 시작하고 서로 아파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과자를 흘리지 않을 만한 나이가 아이는 흘리지 않고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기 어려운 어린 아이는 흘릴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의 의도는 흘리더라도 서로 챙겨가면서 먹는 것입니다. 부모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스러운 아이는 새로운 법을 정해서 부모를 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서로 싸움이 되고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알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은 지키고 그렇게 지켜온 법을 가지고 사람들이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도 못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흠을 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런 일에 대해서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장로들의 유전과 사람의 전통에 대한 기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당신 사람들의 전통은 '고르반'이라고 하나님께 재물로 드릴 것으로 정하면 다른 일에 쓰지 못하고 나아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도 없다고 정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섬겨야 일에 '고르반'하면서 부모를 섬기는 일에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 부모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보다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가 정한, 알게 모르게 들어온 기준이 있어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진리는 아니지만 전통이 있습니다.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의 법은 아니지만 성경의 법보다 엄하게 지켜지는 법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많이 합니다.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러나 헌금을 하면서 부모를 섬기는 일은 소홀합니다. 헌금은 매주 감사헌금이다 십일조다 각종 헌금이다 하면서 하지만 정작 부모님께는 일주일에 한번 전화도 합니다. 부모님께는 하나님께 하는 것에 십분의 일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헌신하고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부모님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정한 사람의 전통이고 유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부모님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의무와 자리를 하나님이 하라고 합니다. 헌금 조금하면서 말입니다.

 

부모를 섬기지 않는 자녀가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인가? 부모는 자녀를 통해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채워야 분량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세운 새로운 유전과 전통으로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이 만병통치 약이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을 헌금 하지 말라는 의도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판의 눈으로 보면 말들도 비판할 있겠지요.^^

 

 

둘째,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것을 조심해야합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문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손을 씻고 씻고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문제인데 사람들은 손을 씻고 씻고의 문제로 비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속이 악한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못하고 사람은 이것이 잘못이다라고 지적하기 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고 음란이고 도둑질이고 살인이고 간음이고 탐욕이고 악독이고 속임이고 음탕이고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손을 씻지 않아도 그것은 사람이 세운 유전입니다. 그것도 지키면 좋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운 유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마음에서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과 탐욕과 속임이 나옵니다.

 

예수님 모세의 부모공경에 대해 말씀하시고 답답하셨는지 다시 무리를 모아서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다시 말씀하신 내용이 이것입니다.(14)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비판하고 비방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오늘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무엇을 봐야합니까?

 

 

셋째, 예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하시는지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7장의 문제의 시작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고 먹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라가 지키는 유전도 안지키는 사람들 한마디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7:2)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러 주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높은 자격을 추구합니다. 지키고 잘하고 흠이 없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 생각합니다.

 

생각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나라가 지키는 씻는 것도 지키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지키는 안식일을 범하고 이삭을 잘라먹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은 이런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기준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목사는 이래야 하고 사람은 이래야하고 높은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준으로 사람을 제단하고 기준으로 사람을 제단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각자 정한 기준은 그렇게 엄격하게 정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서로 섬기라는 말씀,

낮아지라는 말씀,

작은 자를 섬기라는 말씀은 자기 생각과 신앙의 기준에는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제단 하는 기준으로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댑니다. 한국 교회는 몇몇의 목사가 타락을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뿐만 아니라 각자 소견에 옳은 기준을 들이대면서 제단하고 비판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회개를 하면서 저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너무 설교를 못하는 목사님을 정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목사님이 설교가 어눌한 모양입니다. 회개하는 진심어린 마음을 알기에 제가 몇가지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이 죄를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 했습니다. 진리를 어겼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 했습니다.

돈을 흠쳤냐고 간음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 했습니다. 이단이냐 물었습니다.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가 어눌해서 듣기가 힘들다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었습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냐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사십일을 금식하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모든 율법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망한 이유는 모세가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물이 없으니 모세를 죽이려 했고 모세가 백성들의 원망에 스스로 이기지 못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목사, 하나님과 대면한 목사, 자신들을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 그렇게 영적으로 높고 위대한 목사를 향해서도 원망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서입니다.

 

모세 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도 세상은 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립니다.

본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습니다.

기준이,

비판이,

정죄함이 안에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내가 신앙 생활을 잘할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모시면 잘하는 설교 그늘 아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올무가 것입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같습니까?

아닙니다.

비판을 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것이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우리를 비판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높은 기준 앞에 보란 듯이 기준에 미치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왜요?

모든 기준을 충족한들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아닙니다.

기준이 아니라 <부족함의 통로>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보셔야합니다.

 

은혜는 높은 기준 만큼 완벽해 지는 것이 아니라

허물 많은 어떤 사람도 용납하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완벽한 사람>으로 바꾸지 않고

어떤 허물도 용납하는 <용서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비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속에 악이 세상을 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

 

 

 

완벽을 추구하는 인생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어떤 사람도 용서하며 용납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는 !

그것이 은혜입니다.

 

 

 

 

 

 * 가시나무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세상이 가시가 아니라 내가 가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가시를 가지고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니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갈수록

사람을 향해 다가가면 수록 사람들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가시를 빼야 합니다.

사람의 가시가 아니라 안의 가시를 빼야 합니다.

사람의 가시가 아니라 가시를 빼야 합니다.

가시를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을 씻지 않는 ,

사람이 기준에 미치는 것으로 가시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내가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시 많은 인생을 부르셔서 날마다 은혜를 주십니다.

상처 많은 제자들,

나라가 지키는 전통도 유전도 지키던 기준 미달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가시 같은 인생인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