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라 (막6:45-52)
기도는 큰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큰 일을 치루고 나서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일을 치루기 전에 열심히 기도합니다. 큰 행사나 일을 앞두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은 늘 우리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좋으면 그 후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오늘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기적을 베푸시고 재촉해서 사람들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행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큰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늘 박수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큰 일을 잘 치루면 그 자리에 머물고 싶습니다. 박수치는 자리를 즐기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 먼저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친히 보냅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왕으로 삼으려 해서입니다.
세상의 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왕이 되면 왜 안됩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박수 받아 마땅하고 왕으로 삼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을 주님은 거절하십니다. 직분은 왕이지만 일은 종의 일을 하러 오셔서입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왕이니 왕의 자리에 앉아서 대접을 받아야한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왕이기에 더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한다>
세상의 법칙은 왕은 섬김을 받는 자리입니다. 박수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는 왕이니까 대신 죽는 자리, 대신 욕먹는 자리, 대신 더 많이 섬기는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왕 삼으려는 자리를 늘 피하셨습니다. 박수치는 자리를 거절하셨습니다. 왕이지만, 왕이기에 더 낮은 곳을 찾으셨고, 더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왕이 될 자리를 박차고 기도하러 홀로 가셨습니다. 기도는 큰 일 전에 열심히 하는 것보다 큰 행사를 잘 치르고 난 후에 더 많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큰 행사는 우리를 왕되게 만듭니다. 좋은 결과는 사람들로부터 박수 받는 자리에 나를 머물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일 후에, 사람들에게 내가 알려진 후에 더더욱 홀로 기도하는 자리에 가셨습니다.
<행사 전보다 행사 후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큰 행사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는 습관도 좋으나 행사를 마치고 우리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큰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행사 전에 특별 새벽기도 특별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행사가 잘 마쳐지면 그런 기도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아닙니다. 큰 행사 후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붙잡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내가 맺는 열매보다 나의 나무됨, 좋은 나무됨으로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내가 맺은 열매가 나쁜 열매인지 좋은 열매인지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로 결정이 됩니다. 그 나무의 선함과 악함은 주님께 붙어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맺은 열매보다 하나님께 붙어 있기 위해 늘 기도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행사전보다 행사 후에 더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한 주님과 제자들의 차이>
주님은 기도하러 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한밤중에 광풍을 만났습니다. 노를 젖고 가는 것도 힘듭니다. 그 바다로 주님은 걸어 오셨고 제자들은 유령이라 생각하고 놀랐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한마디를 합니다.
"오병이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52)
큰 행사를 잘 치룰 때는 그일을 하신 분이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금방 둔하여져서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던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던 그 시간은 기억도 못합니다. 우리의 힘은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마음에 새겨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배가 출렁이니 그 마음은 금방 둔해져 버립니다.
<둔하여졌다>는 원어는 원래 돌이라는 말입니다. 돌처럼 굳어지고 무감각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가장 큰 문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오천명을 먹이던 주님을 보면서 느꼈던 그 놀라운 내 마음의 감격이 기도하지 않으면 바람에도 배가 출렁임에도 금방 그 감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기도는 주님에 대한 감각을 지킨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힘든 이유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주님이 나와 정말 함께 하시는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이 상황에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만 있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 무디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행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행사를 잘 마치고 기도하는 것은 그 행사에 그 큰 일에 역사하신 주님의 대한 감각이 내 안에 머물러 좋을 때만 아니라 인생의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출렁이고 내 환경이 힘들때 내가 주님에 대한 감각이 돌처럼 무뎌지지 않고 무감각 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다 가져도 주님에 대한 이 감각이 사라지면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 성공한 사람들의 마음은 늘 불안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환경은 어려워도 주님에 대한 감각이 내 안에 살아 있으면 우리는 평안입니다.
주님에 대한 감각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이 감각을 지키기 위해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더더욱 큰 일을 치르고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는 시간에 더더욱 기도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치고 나를 왕으로 더 높여주려는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록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잘 되고 바람이 불 때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를 주님에 대한 감각을 유지시키고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오래 대화하면 나타나는 증상은
첫째, 기도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의 기초는 늘 <자기 중심>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박수치는 자리만 찾아갑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늘 사람들이 환호하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리가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의 중심은 늘 내 자랑이 됩니다. 내가 한 일, 내가 이룬 일이 됩니다.
둘째, 환경에 마음이 지배당합니다.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늘 마음이 요동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환경이 마음을 지배해서입니다. 기도하면 환경을 초월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이 환경을 주관하지 환경이 주님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늘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셋째, 과거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병이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내 손으로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되지 않아 그 기억이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나에게 역사한 과거의 하나님은 이야기책의 하나님이 됩니다. 오늘 현실에서 믿음으로 다시 그 일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지 못합니다.
하루 전의 오병이어를 기억하지 못하고 성경은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일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52)
기도하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 중심이 됩니다.
기도하면
환경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기도하면
과거의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는 하나님은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바다와 바람도 잠잠케함으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아는데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기도 하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과 어려움을 겪고 경험하는 길과
기도를 통해 평안함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 평생에 주님의 주님 되심을 반드시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든지
기도 하지 않고 경험하든지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 기적 후에 홀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것이 주님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6:46)
* 다빈이입니다.
올해 7월 달에 한국에서 돌아와서 초등학교 1학년을 5개월 다녔습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유치원도 다녔지만 반년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와서
학교 적응이 어떨지 생각했습니다.
상을 받았습니다.
은상,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아이에게 주는 상,
그리고 가장 큰 성장을 보인 아이에게 주는 상 이렇게 세가지를 받았습니다.
사회 보시던 선생님이 한국을 반년이나 갔다 왔고
너무 열심히 하고 4개월 만에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놀랐다며
모두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옆에 있던 다빈이 엄마는 눈물을 글썽입니다.
생각지 않은 결과에 대견한 다빈이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위로인지 모릅니다.
아내의 마음에 늘 부담입니다.
은빈이도 그렇지만 과외 한번 시키지 못하고 엄마와 아이들과 늘 씨름을 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안에 생각지 않은 다빈이의 결과에 엄마가 감동이 된 모양입니다.
그리고 상을 받고 나오면서 내 맘에 든 생각이 있습니다.
수빈이입니다.
은빈이도 올해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생각지 않은 상들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잘함이 다른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칭찬도 절제해야 하고
잘했다 말하는 것도 다른 자녀들 보기에 사랑을 빼앗긴다 여겨서는 안되겠다 여겼습니다.
한 아이가 잘 한 것은 잘 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다른 아이가 소외되거나 마음 아픈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요즘 수빈이에게 마음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
혹 한 사람의 잘 함으로 다른 아이를 망하게 할 수 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박수치는 자리에는 늘 소외되고 사랑에 목마른 수 많은 사람이 있음을 또 기억합니다.
박수 받는 사람은 박수로 그 마음이 채워질 수 있지만
박수 받지 못하는 사람은 늘 마음에 아픔과 외로움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우리는 박수 받는 사람보다
박수 받지 못하는 사람을 더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원리는 박수 받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박수 받는 자리가 아니라 박수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박수 받는 자리를 박차고 말입니다.
박수 때 떠나십시오.
박수 받지 못하는 수 많은 세상의 사람들에게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