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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 합니다. 2

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 합니다.  2

 

 

 

 

 

 

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 합니다.  2  (6:14-29)

 

세상의 기준은 자존심입니다.

잘못을 잘못됐다 말하면 말은 맞지만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들의 기준은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파송을 받고 <불편함> 감수하는 훈련을 통해 <예수의 이름>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헤롯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은 이야기와 돌아온 이야기 사이에 이상하게 헤롯왕의 이야기를 넣고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일로 요한이 잘못됐다 말한 것으로 요한은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빼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그것을 일부러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 드린 보냄 받은 제자들의 기준은 얼마나 불편하게 사느냐입니다. 복음을 담는 그릇은 불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릇을 보고 실족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담는 그릇은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유지하는 비결로 불편함에 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헤롯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제시한 제자의 기준가 세상이 살아가는 기준을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우리의 기준은 얼마나 불편하게 살아낼 있느냐입니다. 그것이 <명령>이라 했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귀신을 쫓아낼 사용하셨던 명령의 단어를 제자들에게도 불편함을 감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는 기준은 <불편함>입니다.

얼마나 불편하게 사느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기준은 <자존심>입니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이 지적한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은 것은 옳지 않다 말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감옥에 넣으라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그를 감옥에는 넣었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 달갑게 들었고 크게 번민하고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헤롯의 본심이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6:20)

 

세상은 우리가 바른 소리를 하고 우리가 그래도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을 달갑게 여깁니다. 달갑게 여긴다는 말은 싫은 소리를 하지만 기쁨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감미롭게 듣는 다는 것입니다.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자존심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감정입니다.

<진리> 반대는 <감정>입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말이 맞든지 진리이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사람의 의로운 사람이고 사람의 말에 동의하지만 상한 자존심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거는 사람이 세상입니다.

 

헤롯이 자신의 생일에 많은 사람을 청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러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는데 소원을 말하면 나라의 절반도 주겠다 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딸에게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 말하게 합니다.

 

헤롯이 고민합니다. 이미 말은 했습니다. 말을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왜요? 자존심입니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6:26)

 

 

세상은 자신의 자존심에 목숨을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자들은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불편함에 목숨을 걸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불편함을 버리고 편안함을 찾는 순간 복음의 능력과 권능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편함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 자신의 자존심이 기준입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의 핵심은 <자존심>입니다.

감정이 기준입니다.

 

 

복음이 권능을 발휘하는데 우리가 집중해야 것은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얼마나 내려놓고 남들의 시선과 눈초리를 넘어 불편함을 감수해 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복음은 능력이 사라집니다.

불편함이 기준이 아니라 자존심이 기준이 되면 우리는 세상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로 산다는 , 목회자로 산다는 ,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첫째, 불편함이 일상이 되어야 해서 입니다.

 

비참한 것은 자발적 불편함이 아니라 요즘은 성도들이 불편함을 강요합니다. 목사가 그래서 되느냐 목사가 그렇게 편하게 살아서 되느냐? 과거의 시간에 불편함을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도보다 편한 생활에 집착하는 성도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약함을 보여서입니다.

 

불편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불편함을 자발적 마음으로 가져야 하는데 이제는 보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둘째, 자존심도 내려 놓아야 해서 입니다.

 

사람이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이 나빠도 말도 못합니다. 기준이 나빠도 성도 앞에서 표시도 못냅니다. 화를 내면 목사의 자격이 없다라고 금방 소문이 퍼집니다.

 

시대는 복음을 담고 사는 성도나 목회자나 힘든 시대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떤 모욕과 외면을 당하는지 목회자는 모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얼마나 못할 아픔과 외로움과 상처로 지내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로 세상에서 산다는 ,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서 싸움이 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역을 하고 돌아오자 한마디 하셨습니다.

 

" 쉬자"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6:31)

 

 

그것도 따로 한적한 곳에서 말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제자들,

자존심으로 살지 않고 감정으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 때때로 <>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번잡함과 불편함을 내려놓을 있는 한적한 곳의 쉼이 필요한 것을 주님도 아셨습니다.

 

다들 너무 없이 달립니다.

잠시 잠깐 따로 한적한 곳에서 쉼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입니다.

 

불편함과 자존심을 내려 놓은 자들의 삶에 주님이 주시는 쉼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목숨 걸고 살라 하지 않습니다.

때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수고한 자들에게,

감정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쉼의 공간> 허락하십니다.

 

 

오늘은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쉼의 공간>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도 위로가 되는 하루입니다.

 

 

 

 

 

 * 선교관 한쪽에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선교관에 머무르시는 백선교사님 가정이 파종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함께 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겪는 농사입니다. 마당에도 마당에도 열심히 씨를 뿌렸습니다.

열심히 뿌리고 그리고 싹도 나고 열매도 맺히겠지요.

 

농사도 저에게는 쉼이었습니다.

닭을 200마리 기를 때도 그러고 보니 일이 아니라 중간에 쉬는 쉼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떨어진 일… 쉼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아공 10 동안 우리 가족만 쉬는 시간이 없었음을 오늘 알았네요.

섬겨야 하는 손님들과 함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안식년 한국에 개월씩 다녀오기는 했지만

아내를 배려하고 아이들을 배려하는 쉼이 없었네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쉼은 우리에게 사치였습니다.

사치라 여기는 쉼을 주님이 오늘 <말씀>이라도 하시니 마음에 위로를 얻습니다.

 

다들 일상에서 떨어진 공간에서의 <>,

잠깐의 사치는 어떨까요? ^^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