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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합니다

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합니다

 

 

 

 

 

 

 

 

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합니다  (6:7-13)

 

제자를 파송 하시는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파송한 목적은 얼마나 <불편하게> 있는가 입니다. 

 

 

<권능의 근원은 불편함>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 권능을 주셨습니다. 권능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런데 권능을 담는 그릇인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편함>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제자를 파송 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를 파송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든지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편함입니다.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명하십니다. 여행의 안전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어떤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을 것도, 배낭도, 돈도, 그리고 밤에 광야에서 필요한 여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훈련하시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담은 제자들이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술을 배우려합니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래서 많은 프로그램을 배우러 다닙니다. 많은 세미나를 다닙니다. 복음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한다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복음을 담은 그릇,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먼저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것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단순합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전한 내용도 그것이고 예수님이 전한 내용도 오직 그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복잡하게 전합니다. 권능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한 복음이 성령의 권능이 임하여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 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단한 복음을 없는 복잡한 내용을 더하고 기술을 더해서 권능이 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권능이 임하고 권능을 유지하는 핵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파송 전에 하신 명령입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6:8)

 

예수님이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던 <명하시되>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사람에게 나오라고 명령할 쓰던 원어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제자가 사명을 감당하며 권능을 유지하고 천국복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핵심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오라는 명령과 여행을 위해 가지지 말라는 명령은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오는 조건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권능을 주시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조건은 그들의 <불편함> 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향한 명령 = <불편함>입니다.

 

제자로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조건은 권능이 아닙니다. 권능은 예수님의 권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복음의 권능이 유지되고 보존되는 힘은 제자들의 <불편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를 믿고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시간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예수를 사랑했던 시절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많은 불편함 삶들을 감당할 있었습니다. 불편함이 우리를 복음의 권능아래 머물게 하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귀신을 향하여 명령하여 복음의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향하여 복음의 권능이 임하는 힘으로 우리의 불편한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만 명령으로 들어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세미나와 목회 성공의 방법과 축복 받는 비결을 배우지만 정작 예수님이 명령한 복음을 담아내기 위한 <불편한 >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집을 옮기지 말라>

 

어디를 가든지 영접하는 집에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곳을 떠나기까지 절대 집을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요?

 

사람이 인기가 있어지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모르고 겨우 알게된 집에 거하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권능으로 귀신이 쫓겨가고 병이 나으면서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목사님 집이 좁고 불편한데 우리 집으로 오시지요. 우리 집에 손님 방도 있고 일하는 사람도 있어서 머물기에 좋습니다" 10명중에 9명은 지금 거하는 집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핑계 대고 옮깁니다.

전도하기에 집이 멀다. 내가 있으려니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같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없을 알아주지 않을 때는 집에 있게 하는 것도 감사한데 알려지고 알아봐주고 머리를 숙이면 좀더 좋은 조건으로 옮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오늘 미리 말씀합니다. "옮기지 마라" 나은 조건으로 갈아 타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는 겨우 단칸방도 감사한데 알려지니 알려지는 만큼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알려져야 합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더러난지라>

 

불편함의 목적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귀신이 쫓겨나고 만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로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 "(6:14)

 

복음을 기술적으로 전하는데 인생을 걸지 말고 불편함을 유지하는데 목숨을 거십시오. 우리의 힘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복음의 기술이 아니라 <불편함>입니다.

 

사역의 연륜이 오래되고 사역의 열매가 많아질수록 불편함이 많아지지 않습니다. 편해지고 나은 환경에서 일하면서 불편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를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단칸방에 살았고 차도 겨우 굴러다니는 똥차(^^) 잠시 쉴틈 없이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칸 방에서 이제는 방이 개나 있습니다. 화장실도 개나 되는 집입니다. 똥차에서 비록 중고차를 사기는 했지만 이제는 뒷문도 자동으로 열리는 차입니다. 사람들도 알아봐주고 수고한다고 말하니 어디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생활비도 그렇습니다. 전도사 시절은 헌금 내고 학교 차비를 빼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싶은 고기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사먹을 있을 만큼 그때 비하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모릅니다.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권능을 담아내는 능력은 복음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는 자발적 마음이 없습니다. 목회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불편함이 싫어질 같습니다. 편한 것이 좋고 내가 불편한 것은 죽어도 싫은 세대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님의 명령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증인이 되라고 하시면서 그와 함께 불편함을 감수하라는 명령을 같이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권능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권능은 이미 주어졌지만 우리가 권능을 담는 그릇인 불편함의 그릇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권능을 주옵소서' 아니라 <불편하게 살게 하옵소서>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프로그램을 바꾸고

세미나를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시는 시간에 하신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진리를 담은 그릇은 불편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드러나지 않고 예수가 드러납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편하게 살려는 사람은 명령을 절대 듣지 않습니다.

슬며시 외면합니다.

모른척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불편한 !

 

그래서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편안함>이라는 세상의 속임에

<하늘의 권능>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편한 곳에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불편을 자청하는 삶의 현장에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오늘 그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불편함>,

하늘의 권능을 담는 <그릇>입니다.

 

<불편함>,

천국 복음을 담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 3개월간 이어지던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구역방문이 어제로 끝이 났습니다.

어제는 7,8구역이 윗뱅크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한해 동안 구역에서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구역에서 준비하신 식사와 선물보따리 그리고 교회를 위해 지원해주신 각종 사랑들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선교를 처음 나올 저를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행복한 선교사 서대경입니다."

 

10년째 마음이 변함이 없습니다.

행복입니다.

살기도 바쁜데,

자기 먹고 살기도 바쁜데 선교를 위해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헌신과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알기에

한해도 행복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오시는 분들마다 고백은 자주 오지 못해서 죄송해하고

많이 나누지 못해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마음을 나누는 시간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죄송하다고 주체할 없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너무 편하게 사는 것이,

너무 복에 겨워 감사할 모르고 사는 것이 죄송하다고

연신 주체할 없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사역하는 !

선교사로서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나누지 못해

많이 불편하게 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행복할 같습니다.

 

불편한 선교지를 다녀가시는 그분들의 얼굴과 표정은

제가 한인교회를 다니면 없었던 없이 맑고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주고 가고

버리고 가고

나누고 가는 불편함인데

그렇게 불편함 속에 감추인 행복함을 찾은 기쁨이

돌아서는 모든 구역들의 뒷모습에서 저는 찾을 있었습니다.

 

<불편함!>

복음의 감추인 비밀입니다.

 

 

 

한해 동안도 구역에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