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본건 나 입니다 (막6:1-6)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전쟁터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전쟁터는 가정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어려움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하실 수 없는 일은 나를 아는 가족들, 나를 아는 친척들,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으로 오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사역의 일부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그 사람이 전한 내용을 믿지 않고 그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겨우 몇명>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말합니다.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너의 이런 지혜와 권능은 네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너의 과거를 아는데 나는 못 믿겠다" "너의 부모도 알고 너의 형제 그리고 너의 누나도 우리 옆집에 사는데 너가 왜 이러느냐 못 믿는다"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보다 복음의 그릇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쳐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내용을 보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참담합니다. 고향에서 겨우 몇 명에게만 병을 고치고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입니다.
<시선>
우리가 반복적으로 실수 하는 것이 있습니다.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늘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지 않고 사람의 형체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형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형체에 머무른 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실수하고 과거에 개구장이고 과거에 공부를 못하고 그렇고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의 그 과거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성령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걸림돌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시선이 사람을 넘어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갇힌 생각>
가족과 친척과 나를 아는 고향 사람들은 늘 나의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이 과거에 머물수 없습니다. 성령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과거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는 과거의 예수님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실수는 그것입니다.
과거의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과거에 형성된 생각의 틀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알던 목사님의 그릇에 내 믿음을 가둬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 나에게 역사하는 현재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그 목사님을 통해 얼마든지 일하시고 얼마든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그릇으로 내 생각이 과거에 갇혀서 지금 역사하는 성령의 일하심을 믿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는 곳에는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결코 일하지 않습니다. 아니 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 더러워진 그릇이라도 오늘 작은 물이라도 씻어서 사용하시는 성령입니다. 그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 그릇 안에 든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 더러워진 그릇이라고 오늘 사용하시는 성령의 일 하심까지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그릇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그릇도 사용하시는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일의 주체>
우리가 실수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일의 주체가 사람이라고 여겨서입니다. 아닙니다. 일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어제까지 내가 아는 예수가 오늘 어떻게 이런 예수가 되었습니까?
성령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령의 일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천사들에게 수종을 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바꾼 것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직 그릇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그릇 자체만을 보니 과거의 내 생각에 갇히고 성령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과거에 실수를 가진 그릇으로 성령이 나에게 역사 하시고 오늘 나에게 생수를 먹게하는 생각의 걸림돌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를 바라보면서 그릇으로 바라봅니다. 목사가 얼마나 깨끗한가 얼마나 과거가 깨끗하고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정직하고 얼마나 얼마나… 자꾸 도덕의 완벽을 구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말을 해도 하다못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고쳐도 믿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아는 사람들 가족들, 친척들까지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 더러워진 그릇을 통해서라도 지금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음을 제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과거의 그 사람의 일로 지금 내가 성령의 일하심을 경험하는데 제한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그 사람이 <초점>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더러운 과거를 가진 그릇도 그렇게 사용하셔서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나> 입니다. 우리는 늘 그 사람에게 초점을 둡니다. 얼마나 더러운 과거를 가졌냐 목사가 그렇게 해서 되느냐, 그 선교사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이다 등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이지 이방인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방인을 사용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으로 훈련해 가십니다.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시가 되게 하셨고 훈련하셨고 눈물의 이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더러운 그릇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명이 높은 조교를 통해 우리를 훈련하심을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는 왜 저 조교가 저렇게 나쁜데 우리 앞에 조교로 있느냐고 불평만하고 있다면 마쳐야 할 훈련을 결코 마칠 수 없습니다. 조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 악명 높은 조교를 과거의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의 훈련의 의도, 교정과 조정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기 원하시는 것은 더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을 통해서라도 나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기억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손해를 본 것은 나 입니다>
과거를 너무 잘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박수를 칩니다. 어떤 목사 어떤 형제가 좋은 일과 말을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의 과거를 알기 때문에 마음 문을 꽉 닫고 있었다 참 잘했지 하고 웃습니다. 바보입니다. 오늘 손해를 본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 가족들 친척들입니다. 그릇의 흠이 있을지라도 성령하나님은 좋은 모델로 사용을 하든 안좋은 모델로 사용을 하든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갇힌 생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나이지 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그 사람을 떼어 놓기 전까지 성령의 일하심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시대는 하나님은 특별히 더러운 그릇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백성에게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가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삿2:3)
더러운 그릇을 탓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때로 더러운 그릇을 통해 일하실 때도 있습니다. 언제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돌이키지 못하고 말씀을 청종하지 못한 나의 악함과 약함과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드리고 돌이키는 나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바꾸지 말고 나를 바꾸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면 때로는 팔 년, 십 팔년, 이십 년, 십팔 년, 칠 년, 길게는 사십 년 동안 이방에게 아픔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왜요? 이방인이 초점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눈에 띄는 저 사람에게 초점을 가집니다. 저 목사가 저래서는 안된다. 저 선교사가 저래서는 안된다. 아닙니다. 저 더러운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때입니다. 이방에게 넘기신 작게는 칠 년 많게는 사십 년씩 넘기시는 때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신 태평성대에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머리털도 다 세신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영향을 주고
이 교회에 그렇게 놀라운 영향을 주던 사람을 통해 나에게 아픔을 주는데 왜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한 경고와 훈련이며 초점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의 변화와 회개와 돌이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일수록 더 많은 잡음이 일어납니다. 시대를 악하다 하지 말고 내가 악함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무도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겨우 몇 명입니다. 예수님이 와도 성령이 보내신 의도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를 탓할 것입니다. 예수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저 목사가 과거가 저렇고 저 목사가 도덕적으로 저랬고 조목사는 형편없는 사람이고…"
저런 목사라도 써서 나를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안보이고 나와 다를 것 없고 더 악하다고 말하는 나의 악함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에 믿음이 작동하는 생각과 마음을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더러운 이방인을 사용하셔서라도 나를 바꾸어가시는 수 없는 성경의 과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나이지 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섰을 때 저 목사 때문에 저 선교사 때문에 내가 예수를 잘 못 믿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코미디가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가 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한다면 둘러선 천사들이 웃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이 전한 말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면 허다한 증인들이 참 마음 아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그 사람의 과거에 묻어두지 말고 지금 이 시간 성령께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바꾸지 못하는 곳!
내가 제한한 과거에 매인 과거를 사는 과거의 사람인 <나> 입니다.
지금 여기 이곳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비록 더러운 그릇이라도 그 그릇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 창문을 넘어야 합니다.
성령이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내가 제한하고 있는 과거의 갇힌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성령께서 놀라운 세상을 준비해도 내가 제한한
생각의 틀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주님은 늘 문 밖에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내가 제한 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보고
내가 제한한 창문입니다.
그 창문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
그 문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예비된 축복의 세상의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다고 그들을 보면서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그렇게 사용해서라도 말씀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이 축복의 세상이 내가 과거의 생각의 틀을 깨고 나오는 순간 내 것이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의 적은 <과거>에 갇힌 <나의 생각>입니다.
축복의 성령은 지금도 이 시간에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