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살릴 때 나도 살려야 합니다 (막5:35-43)
고등학교 때부터 예수를 믿으면서 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편애하느냐는 것입니다. 늘 중요한 자리에 이 세 명을 데리고 다닙니다. 변화산에서 그랬고, 갯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도 그랬고 오늘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이렇게 각별히 챙기실까 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김 없이 눈이 떠졌습니다. 평소 4시에서 5시 인데 오늘은 또 2시입니다. 본능적으로 성경을 펴서 오늘 본문을 봅니다. 어김없이 생각합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직 이 세 제자만 데리고 다른 제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5:37)
<오해입니다>
유독 이 세 사람을 챙기는 것 같았습니다. 오해입니다.
첫째, 사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명의 문제를 비교의 문제로 풀려 합니다. 세 제자를 유독 챙긴 것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각자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에 첫 순교자가 되는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끄는 사명입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본 것을 기록한 증인의 사명입니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증인으로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하며 마지막 하나님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둘째, 증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사건에 이 세 사람을 데리고 다닙니다. 다른 사람은 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세 명일까? 깨닫지 못한 것을 무지한 내 눈을 뜨게 하십니다. 율법은 사람이 죽을 때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증인을 두라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확증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영적인 현장에 반드시 세 사람을 함께 데리고 다닙니다. 이유는 기록하고 남기고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가 <세 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그 살리는 장소에 가는 일입니다. 그럼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을 삼으면 되는데 왜 세 명입니까? 그리고 아이들 살리고 다시 요구합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5:43)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린 것입니다>
온 세상에 다 알려야 하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있던, 어디든지 함께 데리고 다니던 제자들을 다 두고 오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왜요?
예수님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상식적으로 왕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종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을 알리면 안됩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왕이 되려면 열두 제자를 함께 데려가고 귀신들이 떠들 때 더 알리라고 말하고 죽은 아이를 살리고 온 세상에 나의 이 놀라운 능력을 알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신은 죽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세상을 살리는 것에 걸림이 되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언제 나 자신이 죽습니까?
세상이 나를 왕으로 삼으면 나는 죽습니다.
세상이 나를 떠 받들면 죽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면 나는 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사람들이 오병이어로 온 세상을 배부르게 할 사람이라고 믿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나를 높여주면 나는 아담처럼 죽게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먹여 살리고 죽은 자를 살려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동시에 자신도 살리려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리는 일을 최소화 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명에 필요한 이상의 증인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꼭 알아야 하는 사람,
증인 세 사람 외에 알리지 않게,
흥분하여 떠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예수님 스스로의 결단이며 각오입니다.
예수님이 세 명을 데리고 다니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최소한의 증인을 남기기 위해서이고 더 많이 본 자들에게 더 많은 아픔의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많이 누린 자는 더 많이 요구합니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본 자는 더 많은 버림과 아픔의 사명을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본 자들입니다. 더 많이 경험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편애 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더 많이 받은 자, 더 많이 누린 자는 더 많이 드리고 더 많이 바치고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고난의 길을 자처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많이 본 자와 더 많이 영적인 은혜를 누린 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은 영적인 축복을 가진 것을 세상에서 높아지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것이 가짜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스펙은 더 많은 혜택을 의미합니다. 뭔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더 경험하고 남들 가지지 않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더 많은 누림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먼저 그 법칙을 무너뜨립니다.
더 많이 가졌기에 더 자신을 알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아십니다. 세상이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에 환호하는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더 많은 혜택임을 본능이 알고 본성이 압니다. 내 몸에 반사신경이 있듯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높아질 기회 앞에서 최소한의 사람,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다닙니다. 편애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편애는 그 세 사람에게 죽음이고 십자가이고 눈물의 길, 좁은 길입니다.
세 사람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도 세상이 보기에 더 많은 재주(?)를 가졌기에 더 많이 드리고 결국 자신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길>
영적인 길은 더 많이 본 자, 더 많이 누린 자가 더 많이 내 놓는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요구한다 했습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왕이 되려 하면 우리는 나를 더 많이 알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되려 하면 나를 알리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종은 많이 받은 만큼 더 많이 드리고 나누는 자신을 비우는 일에 힘써야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를 세상에 알리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조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왕 대접 받는 것!
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람으로 대우 받는 것!
내가 구하고 취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일등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의 V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영은 우리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핍박할수록 믿는 자는 더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세상은 우리를 세상이 알아주는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왕이 되고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죽이는 가장 멋지고 더 허무하며 더 화려하게 추락시키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 교회가 나의 승리를 온 세상에 알리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말입니다.
왜요?
적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환호와 박수에 무너지는 나 자신임을 주님은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도 세상이 알아주니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저 목사님도 세상이 박수 치니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목사님들이 그렇게 그렇게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수고로 모은 숫자보다 그들의 추락으로 흩어지는 숫자가 더 많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영이 노리는 전략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사십니까?
알려 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아주는 순간
나를 통해 세상은 더 많은 사람을 예수로부터 빼앗을 것입니다.
<나를 지키는 길, 양들을 지키는 일>
세상이 알아 줄수록 더 많이,
이전에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 전보다 더 많이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본전이 됩니다.
세상에 나를 알리고 싶을수록
세상에 더 많이 엎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을 무서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 자신을 더 두려워 해야 합니다.
악은 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더 깊이 더 교활하게 더 그럴듯하게 숨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다면
세상에 자신을 알리려 하지 말고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 당신이 진짜임을 알게 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나는 없어지고
나를 본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환호할 일,
죽은 자를 살릴 때 나도 살려야 합니다.
세상은 살리면서 나를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먼저 살리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나를 부르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요셉이 살린 것은 자신의 가족과 민족과 애굽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세상이 나를 향해 환호 할 때,
자신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붙잡을 때
내가 가진 것을 던져 버리지 않으면 결국 내가 죽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리신 주님입니다.
아무도 따르지 못하고 오직 증인 세 명만 데리고 다니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린 주님만 보입니다.
부럽고 나도 가고 싶은 세상이 다 알아주는 그 길!
그러나 주님이 살린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입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면을 쓴
나 자신을 <먼저> 살리면 좋겠습니다.
본능을 이겨야 합니다. 내 몸 안에 꿈틀거리는 나를 알리려는 본능적 싸움!
내가 싸워야 할 진짜 싸움입니다.
* 이전에는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실수록 나는 내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목회하지 않으시고 나를 목회하십니다.
나를 목양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양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나입니다.
예수님의 목양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하나씩 더 늘어나고 사역자가 한 명씩 더 늘어나면서 나는 내가 더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영광들을 나도 모르게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고 내 속에서 말하고 싶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핑계 삼아 나의 영광을 얻으려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리려는 나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더 많은 경험과 본 것과 열매로 남들 누리지 못하는 세상적 누림이 자꾸 욕심이 나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치면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반사작용처럼
내 안에 나를 죽이려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가는데 가장 조심하신 것,
세상을 살리기 위해 가장 잘 돌보신 것!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