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막5:21-34)
사단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소망 없다, 저거 안 된다. 나는 안 된다. 내게는 소망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무슨 좋을 결과가 나오겠나? 이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나타나는 결정적 증상 한 가지를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한가지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환경과 마음을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찾는 유일한 한가지도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에게 그 믿음만큼 일하십니다.
<믿음의 분량>
예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대화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기 전 하신 일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입니다. 우리가 확장시키고 우리가 키워야 할 것은 우리의 스펙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존경 받는 사람인 회당장과 아무 이름없는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입니다. 신분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만의 믿음의 분량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당시 회당장은 행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가장 우두머리이며 인격과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구하는 내용은 그 사람의 격식에 맞게 나아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끓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딸이 죽어가니 집으로 초청을 합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딸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가진 격식과 예가 묻어 있습니다. 무례하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이 그 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병 앓는 여인>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감히 요청도 못합니다. 그런 지위도 그런 용기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저 지나치는 여인입니다. 예의도 갖추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냥 길을 가는 예수님을 살짝이라도 만지는 것도 어려운 여인이라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도 예수님의 옷을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5:34)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천한지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생각한 믿음의 분량대로 나를 대우하시고 나를 고치시며 나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집에까지 가서 내 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면 나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렇게 따라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음대로 고침을 받도록 허락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믿음의 분량>
내가 <믿는바 대로> 인격적으로 나를 대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이 생각하는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이 있었고,
모세에게는 모세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시험을 당할 때에 예수님을 베드로를 향하여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반드시 믿음의 분량,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믿음의 분량은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각자의 분량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분량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훈련이라는 광야에도 세우시고
애굽에도 세우시며
사단의 시험의 자리에도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지난 후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광야는 딸이었습니다.
그 딸의 아픔이 그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은 혈루병이 믿음의 분량을 채우는 조건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당한 환경,
내가 당한 어려움에 집중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딸의 아픔, 내가 가진 혈루병과 열두해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분량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도 지나고
열 두 해도 지나고
각자의 채워야 할 시간을 보낸 후에
우리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5:34)
사단은 우리에게 환경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믿음의 분량을 채우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눈의 한계입니다.
내 안에 갇혀서 나만 보도록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으로 주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 믿음의 분량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딸의 아픔이,
자신의 혈루병이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을 채워서 온 세상에 주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픔이 믿음의 분량으로 발효되고
눈물이 믿음의 분량의 효소가 되도록
그래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절망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 화이팅입니다.
* 윗뱅크교회의 샘목사님입니다.
샘목사님은 우리 선교의 첫 사역자입니다. 벌써 16년째입니다.
샘목사님의 수고와 눈물은 이루 말로 못합니다.
조그마한 양철 집에 다섯 식구가 살고 아내는 거의 죽을 만큼 병이 걸려 은혜로 살았습니다.
두 부부가 심방을 나간 사이에 사진 옆에 보이는 막내가 약을 막 먹어서 아이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합니다.
많이 좋아지고 지금도 매달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와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할 마음을 잃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 자기를 지키고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교회와 사역자들을 잘 돌보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한 마트에서 빵을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역자들을 위해 매일 30만원 정도의 빵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매일 각 교회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윗뱅크교회입니다.
오늘은 보통의 2-3배 정도의 빵이 나왔습니다.
너무 행복해하는 샘 목사님을 봅니다.
살아 숨쉬는 것조차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늘 한번 보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짐과 무거운 짐이 나를 눌러서 호흡 한번 마음껏 하는 것이 힘든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 짐에 눌려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오도록,
주님께 믿음의 분량을 채우고 당당하게 서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왔던 수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두 사람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던 여인,
오직 두 사람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의 분량 때문에 말입니다.
아픔이 믿음의 분량으로 발효 되어야 합니다.
눈물이 믿음의 분량의 효소가 되어야 합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의 시간을 보내고 주님이 <합격>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는 그 한마디를 위해 우리는
숨쉬기조차 어려운 시간에 주님을 향한 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찾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의 분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