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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돼지 떼 이 천입니까?

왜 돼지 떼 이 천입니까?

 

 

 

 

 

 

 

 

돼지 천입니까? (5:1-17)

 

사람이지만 영향력은 사람이 아닙니다.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속에 <군대> 들어 앉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잡지 못하고 쇠사슬로도 그를 묶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봅니다.

 

아닙니다. 사람은 군대도 들어가 있을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힘입니다. 어두운 힘이 들어 있으면 악한 군대가 되기도 하고 성령이 들어 있으면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천하가 들어갈 있습니다.

 

 

귀신을 나가라 하니 돼지 이천 마리에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보는 세상 사람들은 돼지 마리 보다 못한 인생으로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을 돼지 이천과 바꿉니다. 마을 사람들은 돼지가 죽는 것이 사람 생명 구하는 것보다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떠나라 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이익입니다. 사람이 평생 귀신으로 살던 무덤 사이에서 살던 옷을 입고 살던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돼지 떼만 손해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돼지 이천이 아니라 이만을 주고서라도 아니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인 자신을 죽여서라도 살리는 분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세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안에 더러운 것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 오기를 반복하면 악한 모습이 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다시 죄를 지으면 이전보다 악한 마음과 영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제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신앙 연륜이 쌓일수록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안에 군대가 들어 앉았습니다. 평생 악한 마음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면 아무도 사람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것은 주님은 사람도 돼지 이천보다 귀하다 여기십니다. 사람들은 포기하고 사람들은 버리지만 주님은 돼지 이천보다 가치 있다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포기하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귀신 군대가 들어가 있는 사람 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많은 군대가 들어 있으나 한마리의 군사가 들어 있으나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사람에게는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나왔다 들어 갔다를 반복합니다.

 

한번에 군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한번에 한번씩 그러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고 들어가기 좋으니 나왔다 들어갈 수십 수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의 반복은 우리를 더욱 악하게 만듭니다. 죄를 반복하고 악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꾸 반복하는 죄는 우리를 군대 귀신 만듭니다. 옛날에는 눈에 띄는 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귀신도 트렌드를 바꾸었습니다. 고상한 귀신입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귀신입니다. 자신의 이론과 논리로 믿는 자들을 힘들게 합니다. 자신의 말만 맞다고 자신의 논리만 맞다고 합니다.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의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겉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상한 논리, 신앙을 가장하고 믿음을 가장하고 교회를 위하며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수백 수천의 사람을 이상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WCC 논리는 수백 수천 수만의 사람을 이상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나도 모르게, 주를 위하고 평화를 위하고 하나라는 논리가 있지만 속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논리와 이성적 접근만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군대 귀신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논리와 아름다운 옷을 입었을 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논리가 있습니다. 자기 이론이 있습니다. 자기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화 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만의 귀신으로 가장한 이론과 경험과 논리가 있습니다. 쇠사슬로도 묶지 못하고 사람들로도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들의 이런 모습은 결국 자기 몸과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5)

 

이들의 특징은 혼자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높은 완성은 <함께>입니다. 다르지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궁극적 목표는 함께함이고 하나됨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은 결코 함께하지 못합니다. 밤이고 낯이고 무덤 사이에서 산에서 혼자 다닙니다. 자신 만의 언어로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이들의 결국은 자기의 몸을 해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논리와 이론과 경험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이 허전하고 자신의 몸이 무너집니다. 주를 위해 수고해서 닳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자학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 영혼은 결국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함께함의 축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홀로, 혼자를 버려야 합니다. 부부도 기도하는 외에는 따로 있지 말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주님도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평생 제자들과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자꾸 스스로 고립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끼는 페이스북을 사람들의 느낌은 함께하기 위해 이렇게 좋은 도구를 주셨는데 함께하는 일에 손가락을 아낍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고 가는 <좋아요>속에 개인이 느끼는 풍성함과 행복함은 이루 말할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관합니다. 외면합니다. 우리 딸은 자신이 올린 사진이나 글에 좋아요의 횟수로 행복감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격려의 차원 하나됨의 차원에서 좋아요를 누르면 가장 쉽게 이웃에게 행복을 안겨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르는 <좋아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장 쉬운 방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있습니다. 자기만의 논리, 자기만의 이론, 자기 만의 스타일에 갇혀서 하나님이 주시는 서로에게 채워줄 행복의 기회, 함께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모든 우리 삶의 방편들은 서로를 섬기는 기회입니다.

어디 밥을 사서 행복하게 하고 섬겨서 행복하게 만드는 뿐이겠습니까?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인식을 문자를 보내고 메일을 보내고 선물을 보내고 만나서 식사를 하는 뿐이겠습니까? 페북은 그렇게 저에게 사람에게 행복을 채워줄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귀신이 들어가면 '좋아요' 자기만의 논리와 이유를 답니다. 글이 좋아서 스타일이 아니어서… 논리 이론 생각입니다. 그래서 좋아요를 누릅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좋아요> 누르는 손가락 하나가 사람을 신바람 나게 합니다.

 

귀신이 처음부터 귀신이었을까요? 군대 귀신이 어디 처음부터 군대 귀신이었을까요? 처음은 귀신이 아니었겠지요. 다른 이를 통해 사는 재미를 느끼고 다른 이와 함께하는 기쁨을 모르고 외면 당하고 무시 당하는 감정을 통해 마리의 귀신이 들어 왔겠지요. 그러다 은혜로, 누군가의 사랑으로 귀신이 나갔겠지요. 그러나 다른 이의 논리와 이론과 자기만의 고집에 상처받고 홀로되고 외롭고 그러다 혼자 혼자 산으로 바다로 무덤 사이를 다니다 귀신이 마리가 되고 그러다 열 마리 백 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땅에 주신 대안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신바람 나게 하고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작은 관심과 사랑이 우리를 귀신들리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압니다.

교회 안에서 소리치고

나름 논리와 이론과 경험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고함치는 소리 속에 들리는 외로움을 말입니다.

나름 자기만의 논리로 교회가 이래서는 된다고 소리치고

나름 자기만의 관점과 소신으로 비판하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허전함을 말입니다.

 

소리 치는 사람일 수록 외로운 것입니다.

강한 비판과 자기의 논리로 싸우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그냥 사랑입니다.

그냥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입니다.

그냥 그대로를 맞아주는 <안아줌>입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귀신을 나오라 하면 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군대 귀신을 돼지 이천에게 들어가라 명하십니다.

 

왜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군대 귀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돼지 만도 못한 자기 인생,

돼지로도 취급 받지 못한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돼지 이천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는 느끼게 하는 것이 주님이 귀신들린 자를 향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사람이 귀신 들렸겠습니까? 외로워서입니다. 함께 살다 함께 사는 것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하고 사랑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한 마음에 귀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를 돼지 이천이라는 <가치>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나도 돼지 이천보다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안정감> <중요감> 동시에 충족이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소속감>입니다.

 

주님이 오늘 군대 귀신들린 자에게 베푸신 은혜는 중요감 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속감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따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따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5:19)

 

가족에게 돌아가 소속감과 안정감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일을 행하심으로 중요감을 얻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살하고 사람들이 귀신에 들리고

교회에서 고함을 치고

교회에서 소리를 치고

교회에서 자신만의 논리로 싸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안아주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껴서입니다.

 

우리는 논리의 ,

이론의 ,

경험의 방패로 싸우는 자에게 다시 칼과 창과 방패로 맞으려 합니다.

아닙니다.

진단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논리로 맞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칼에 맞아주고

창에 맞아주고

방패에 얻어 맞아주는 사랑의 사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리를 가자 하면 리를 가고

옷을 달라하면 옷도 내어주라 하시고

오른 뺨을 치면 왼쪽도 내어주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답은 같은 논리와 같은 이론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논리와 이론을 품을 있는 하늘로부터 임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않고

우리는 다시 세상을 향해 가려 합니다.

세상과 같은 방법으로

세상과 같은 논리로

이에는 눈에는 눈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가면 우리도 귀신 들립니다.

더한 군대 귀신이 들립니다.

 

싸움은 우리도 외롭게 하고 우리도 허전하게 하고 우리도 홀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전략은 대중문화가 아닙니다.

사단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전략은 음란함도 아닙니다.

사단이 세상에서 선택한 마지막 전략은 <홀로 되는 >입니다.

 

 

외롭게 하고

허전하게 하고

철저히 고립되는 세상을 만듭니다.

서로 경쟁하게하고

오직 자신만 믿고 자신만 돌아보고 자신만 중요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말세의 징조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신바람 나게 하는데

이미 받은 상처로 손가락 하나도 누르지 못하는 외로움입니다.

이미 외면 당하고 고립되어서 좋아요 한번도 누르지 못하는 철저히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돼지 이천을 죽이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살맛 나게 하기 위해서 돼지 이천도 죽이시는 주님인데

도와 주는 것은 고사하고

문자 한번 보내는 것도 인색하고

메일 한번 보내는 것도 귀찮아하고

페북에 손가락 한번 눌러서 좋아요 한번 누르는 것도 힘들어할 만큼 우리는 이미 논리의 귀신,

이론의 귀신에 들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없는 지경의 사람들이 것은 아닙니까?

 

아는 분들을 보면 친구가 명이 됩니다.

그런데 <좋아요> 겨우 열명도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페북을 통해서 더더욱 고립되고

무덤과 무덤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외로움의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느 이름없는 목회현장에서 사역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힘들게 사시지만 좋을 글을 쓰셔서 책도 내시고 새로운 인생을 사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분은 페북 친구가 천명이 넘었습니다. 글이 좋아서 좋아요를 누르기도하지만 힘든 목회, 힘든 삶에 많은 분들이 누른 좋아요가 그분을 더욱 나게 해서 더더욱 좋은 글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좋아서 누르지 않아도 내가 아는 사람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며 섬기는 마음으로 아는 친구들 좋아요를 누르면 우리모두 신바람 나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성도는 그래야 합니다. 내가 성공해서 주를 위해서 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속에 만나는 나그네에게 냉수 그릇으로 그들의 걸음을 시원하고 가볍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

우물을 파라 하지 않습니다.

공장을 세우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있는 냉수 그릇으로 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옷으로 잠시라도 추운 한기를 피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구나

내가 사랑 받고 있구나

내가 중요한 사람이구나 라는 마음!

마음 때문에 주님은 오늘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돼지 이천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

번의 좋아요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청년회

중고등부

교회가 사람을 살리고 싶으십니까?

번만 손을 잡아주면 얼마든지 살아날 같습니다.

 

시대에 우리에게 이웃에게 필요한 !

기적이 아니라

작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냉수 그릇!

돼지 마리!

 

냉수 그릇,

돼지 마리가

여러분이 되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외로워 죽어가는 친구에게 말입니다.

 

 

 

 

 * 다빈이와 수빈이입니다.

다빈이는 행복합니다.

이유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사랑을 많이 표현해 주십니다.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니 아이가 밝게 자랍니다.

 

수빈이는 한국을 가기 전에 유치원에서 가장 밝고 씩씩하고 발표회 가장 칭찬을 많이 받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갔다 와서 이전보다 기분이 많이 다운 되었습니다.

주관적인 생각에 유치원 선생님이 원인입니다.

올해 선생님도 좋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작년 수빈이 선생님에 비해 올해 선생님은 사랑 표현이 적습니다.

아이가 반대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밝아지고

아이는 상대적으로 다운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채워줄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가장 중요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부모가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맛 나는 세상을 사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나누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우리에게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 받으려 하면 그것은 도둑입니다.

거짓입니다.

불법입니다.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귀신들린 자에게 베푼 선행되는 축복의 은혜입니다.

 

사랑의 표현!

군대 귀신들린 자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돼지 이천!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