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마지막은 풍랑속 단잠입니다.(막4:20-41)
축복이 뭔지 아십니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는 사람 기적을 안 베풀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사람 깨닫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은 밭 안좋은 밭은 결국 열매는 맺는 밭 못 맺는 밭입니다. 열매는 맺는 밭은 말씀을 깨닫는 자이고 열매를 못 맺는 밭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결국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밭이고 말씀을 깨달으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밭입니다. <깨달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말씀하셨지만 무리도 못알아 듣고 제자들도 못알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따로 있을 때 그 비유들을 풀어주시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그 이유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일들은 반드시 드러나고 알게 된다>
<등불>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상 밑에 두지 않고 높은 곳에 두는 것같이 아무리 감추어 둔 것도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석해주고 나는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결국은 알게 되고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헤아림 즉 측정하고 계산한 대로 우리는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결국 우리가 헤아리고 측정하고 남긴대로 우리가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이 깨달은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적은 열매 맺어서 많은 열매를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적게 가진 자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긴다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깨달은 바대로 살게 되는데 모든 것이 드러나서 깨달은 바의 열매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비유로 주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제 밭에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리니 땅이 싹을 내고 이삭이 되고 곡식이 되는데 그 곡식의 열매를 일군들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이 오늘 마가복음 4장에서 하시는 말씀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통해 열매를 얼마나 맺느냐 못맺느냐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알려지는데 우리의 계산과 측정한대로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많이 깨달은 자는 많이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것을 주님은 여러 모양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비유로 겨자씨 비유를 하십니다. 겨자씨는 세상에서 어느 것보다 작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씨가 되어 땅에 있으면 나물보다 커서 모든 새를 깃들이게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게 미미하고 작지만 좋은 땅에 심겨져서 세상이 볼 수 있는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의 <점진성>을 설명합니다. 그 점진성의 핵심은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깨달은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을 주십니다. 첫째는 말씀을 깨닫는 만큼입니다. 우리 인생의 깊이는 결국 말씀을 얼마나 깨닫느냐입니다. 말씀의 깊이가 인생의 깊이고 말씀의 깊이가 삶의 깊이가 됩니다.
둘째, 바람과 풍랑 치는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난 깊이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말씀의 깊이를 비유를 풀어주시므로 깨닫기 원하는 자들에게 축복으로 주십니다. 축복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 스스로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비유를 풀어주시는 주님은 오늘 제자들과 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가 큰 광풍을 만납니다. 제자들이 다 죽게 되어서 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십니다.
제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과연 이분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41)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게도 하시지만 또한 삶 속에서 만나는 여러 모양의 바람과 폭풍 속에서 주님이 일하심을 통해서 주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는 오늘 두 가지를 대조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알게 되는 진리이고 또 하나는 바람과 풍랑 가운데 만나는 주님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비바람부는 세상속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두 깨달음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말씀만 깨달아 아는 자들은 주로 어릴적부터 예수를 믿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자란 모태신앙의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좋은 양질의 기독교 신앙의 뿌리에서 말씀을 잘 깨닫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분들에게는 삶 속에서 만나는 여러 세상의 바람과 풍랑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편안하게 살고 싶지 세상속에서 여러 역경을 이겨냄으로 말미암는 현장의 영성은 부족한 것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머리의 하나님은 있는데 가슴의 하나님은 없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를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수아를 마치고 사사기 시대를 사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의 현장과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셨는지 앎(히:야다)이 없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가는 길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말씀의 깨달음은 없는데 현장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신앙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불신 가정에서 자란 사람의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삶을 인도하셨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수 많은 간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체험이 있고 죽을 만큼 힘든 삶 속에서 주님이 기적적으로 인도하신 삶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는 가슴은 있는데 머리가 없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서 늘 교회 일에 앞장서지만 말씀의 원리와 말씀의 방향이 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늘 이런 뜨거운 기적의 현장과 극적인 감정의 느낌을 찾아 헤매이게 됩니다.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교회 안에서 눈에 띄는 분들은 주로 이런 분들입니다. 체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체험이 지속적으로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교회가 죽었다고 하거나 담임목사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어둡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다 자기 체험이 우상이 된 경우입니다. 기준이 된 경우입니다.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오늘 두 가지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말씀으로 시작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말씀이 되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되도록 삶의 치열한 바람과 바다를 지나게 하십니다. 오죽하면 아내도 누이라 속이며 살았겠습니까? 그만큼 삶의 현장은 풍랑 치는 바다 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바람과 풍랑 치는
<바다 위>에서 확증됩니다.
바다 위에서 말씀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리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후 제자들을 바다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4:35)
건너편 마을로 가기 위해서 가자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을 깨닫게 하신 제자들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건너 마을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을 풀어 깨닫게 하심과 같이 세상의 바람과 풍랑 치는 바다에서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마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풍요로움과 말씀만이 넘쳐나는 곳에 사단이 들어오도록 허락한 것은 말씀을 깨달아 산다는 것은 사단의 바람과 풍랑 속에서도 내 깨달은 바가 세상에서도 진리임을 몸으로 싸워 말씀이 열매 맺는 것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만나주신 주님은 그 말씀이 세상 속에서도 진리임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반응하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믿음을 만나는 바람과 풍랑 치는 바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힘을 가지고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교회 안에서만 말씀이 아니고 풍랑치고 죽을 만큼 넘실대는 세상의 바다에서도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심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햇빛 내리쬐며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나무 밑 동산에서만 말씀이 아니라 사단이 유혹하고 바람이 넘실거리며 세상에서 죽을 것만 같은 바람 이는 바다에서도 주님의 말씀이 계시니 넉넉히 이김을 알게 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하나하나 깨닫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 우리를 바람 치는 바다로 이끌고 가시는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깨달은 그 말씀의 주인이 바람불고 비바람 치는 세상 속에서도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며 세상의 왕임을 나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만큼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으로 시작한 오늘 4장의 말씀은 결국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데 그 결론은 우리가 깨달아 아는 만큼의 열매로 주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과 싸워 이긴 주님을 깨달아 아는 만큼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웅덩이>
그래서 말씀은 믿음으로만 반응합니다. 말씀의 깊이는 믿음의 웅덩이만큼 뿌리를 맺습니다.
세상은 <믿음의 웅덩이>를 파는 곳입니다. 세상은 웅덩이가 빠져 죽는 곳입니다. 바다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달은 우리는 그 웅덩이가 말씀의 씨앗을 심는 곳입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말씀이 자라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곳입니다.
바람이 심할 수록 믿음의 웅덩이는 깊은 뿌리를 내리는 기초가 됩니다. 풍랑이 클 수록 밭은 커지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주님은 그 말씀이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저주하고 잘라버리라 명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를 자르고 마르라 저주하지 않기 위해 우리를 풍랑치는 바다로 가자고 하십니다.
가라고 하지 않고 가자고 하십니다.
주님이 직접 우리의 배에 타고 평안하게 주무시면서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이 없으십니다.
바람 치는 바다에서 우리는 죽게 되었는데 주님은 말이 없습니다.
<주무셔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풍랑과 바다의 요동함이 죽을 일이 아니라 잠잘 수도 있는 평안한 곳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자라갈 그리스도의 분량은 바람불고 풍랑 이는 세상에서 평안함으로 잠잘 수 있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말씀을 믿고 잘 수 있는 평안함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평안함은 함께 손잡고 걷는 <친구>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말씀이 자라는 <믿음의 웅덩이>입니다.
우리 눈에 그것이 바람이 풍랑이지만 주님은 바람도 아니고 풍랑도 아니고 오직 말씀의 씨가 잘 자라는 믿음의 웅덩이로 보시는 것입니다.
힘든 세상에서 믿음으로 깨달은 말씀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바람과 풍랑 속에서도
아름다운 열매 맺는 축복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전도를 나갔습니다.
작은 처마 밑 그늘에 앉은 이들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지만
자신들의 고향집 처마 밑에 모든 시름 내려놓고 쉬는 이들이 그저 안쓰러워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렇게 찬양을 하고 노래를 부리고 춤을 추지만
세상에서 여지없이 그 마음이 평안은 도망가 버립니다.
거짓말을 해야하고
도둑질을 해야하고
치열하게 싸움을 해야하는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찬양하는 모습으로 살면 좋게습니다.
내가 아는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세상에서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져야 이기고
나누어야 행복이고
섬겨야 축복이며
믿음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을
믿음으로 한 발걸음을 걸어야 세상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이 큰 수록 두려움도 크지만
풍랑이 클 수록 믿음의 웅덩이도 크기에
주님이 주무시는 그 단잠이 오늘도 참 부럽기만 합니다.
믿음의 웅덩이…
주님이 이끄시는 바다 위의 단잠의 비결입니다.
<믿음>과 같은 말,
<단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