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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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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3:7-12)

 

아담이 숨었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땅의 인류는 <숨바꼭질> 시작이 되었습니다. 숨는 자와 찾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이 찾으시고 우리가 숨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놀이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숨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람을 고쳐준 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그리고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물러가셨습니다. 그들이 찾지 못하게 숨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자신을 찾으려하는 순간만다 반드시 홀로 숨으셨습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말입니다.

 

숨바꼭질의 찾는 자와 숨는 자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움직이는 표현은 <물려가시니> 또는 <말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등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사람들이 숨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찾고 하나님이 숨고 계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찾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많은 무리가 찾아오자 예수님은 이제 바다로 배를 타고 물러가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은 먼저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바다로 산으로 예수님은 숨는 자가 되셨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숨바꼭질에는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숨는 >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숨었습니다. 숨는 자는 반드시 숨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까요? 벗은 몸을 가렸고 얼굴을 가렸습니다.(3:7-8) 우리가 숨는 자가 것은 우리의 벗은 몸입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괜찮던 벗은 몸을 갑자기 가렸을까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을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한 이유를 성경은 그들이 벗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벗은 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고 숨지 않던 자가 선악과를 먹고 갑자기 부끄럽고 숨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선악과의 본질은 <다름>입니다. 사탄이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하와에게 심겨준 생각은 <하나>에서 <다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다르고, 나와 나의 몸이던 하와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되려 했고 나의 몸이던 하와도 다르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부끄러움 자체는 결국 두려움이 되어 하나였던 아내와 남편에게도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하나님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를 다름으로 인식하며 가졌던 하나님이 되려는 욕심이 결국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를 다름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죄의 시작은 하나를 다름으로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높아지고 나아지려는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 결국 높아지려는 마음에서입니다. 높아지는 곳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의 시작은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피해 다녔습니다. 멀러 나셨습니다. 자신을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숨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과 다릅니다. 아담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기 위해 숨으십니다.

 

아담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시작되어 숨게 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숨으십니다. 아담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다 숨게 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숨게 되십니다. 결과는 아담은 두려움이고 예수님은 평안입니다. 아담이 것은 <두려움>이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은 <평안>입니다.

 

우리 안에 찾아온 두려움의 본질은 높아짐입니다. 높아짐은 결국 하나가 틀림으로 인식되게 합니다. 몸인 아담과 하와 자신도 스스로 다르게 인식하고 서로 다름으로 부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높아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안입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자신의 출생, 출세, 함께 거하는 친구까지도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모든 것에 높아지려는 마음이 없으니 인류가 잃었던 평안을 가졌습니다.

 

인류의 숨바꼭질!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나의 수치가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

모두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에서 나온 인생의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보았습니다.

귀신도 알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십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3:12)

 

예수님은 드러나는 곳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이 숨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숨으십니다.

꼭꼭 숨으십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드러내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작은 자들

벗은 자들,

굶주린 자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 속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찾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찾는 >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인생을 걸게 됩니다. 세상의 본능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는데 목숨을 거는 것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숨으십니다. 작은 자의 숨소리에 계십니다.

 

부활 엠마오로 가는 길은 10키로입니다. 제자가 10키로를 가는 동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기적과 불과 지진 소리 중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만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몰려가는 , 사람들이 주목하는 ,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작고 평범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 높은 산에도 없으시고 화려한 성에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아니 하나님은 작고 초라한 내가 외면한 사람의 인생에 거하십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았습니다.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열심히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커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합니다.

숨어 계신 ,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없으십니다.

사람을 피해다니시고

낮고 천한 사람들,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속에 숨어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숨바꼭질을 하십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술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술래입니다.

 

숨바꼭질은 놀이입니다.

그냥 놀이가 아닙니다.

생명이 걸린 놀이입니다.

아담이 영생을 걸었고

인류가 생명을 걸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걸었던 생명의 놀이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바꼭질을 합니다.

생명을

영생을 생명의 숨바꼭질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달려가는 곳이 아니라

세상이 달려가는 반대쪽에 하나님이 숨어계십니다.

 

답을 가르쳐줘도 우리는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내가 술래가 되어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찾아야 사람이 숨게 되고

숨어야 사람이 찾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 이상한 놀이가 지금도 한창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내가 찾아야 합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나와 숨바꼭질 하는 에덴에서 나를 찾던 하나님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과 권능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고

작고 초라한 우리 일상의 작은 곳에 숨어 계십니다.

숨바꼭질 입니다.

내가 찾아야 하는 숨바꼭질…

 

인생은 숨바꼭질 입니다.

나를 찾는 숨바꼭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숨바꼭질 말입니다.

 

 

 

 *모잠비크입니다.

모잠비크에 세워진 저희 선교지 교회가 농장사역을 하는데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입니다.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전기도 물도 없는 !

 

작고 초라한 사람들이 겨우 하루 한끼를 먹으며 사는 !

예수님이 사신 곳은 이런 곳이었습니다.

작고 초라한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우리가 높은 성과 화려한 곳을 향하여 달려갈 때…

숨바꼭질입니다.

인생은….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