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는 인생 고발하는 인생 (막3:1-6)
예수님도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 큰 사업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일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가장 먼저 나온 사건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는데 귀신 들린자가 있어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기다렸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모두가 평안히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쉬어야 하는지 그분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안식입니다. 그것은 나만 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쉬는 것입니다. 모두 쉬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형제가 죽어가고 형제가 아파하고 형제가 눈물 흘리는데 안식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지 보고 고발 하려는 자들 앞에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습니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요?
그들은 마음이 없습니다. 형제에 대한 마음, 아프고 힘든 자들도 안식일에 함께 쉬고 고통에서 자유 하게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3:5)
'완악함'의 원어는 <돌같이 굳어지고 무감각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시고 화를 내신 이유는 돌같이 굳어지고 무감각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아픈 사람에 대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평생을 고치지 못하는 병과 가난과 아픔으로 어둠에서 지내는 그들을 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돌처럼 굳어져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보시고 탄식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안식과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의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무감각해져서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대를 비유할 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돌처럼 굳어지고 무감각한 마음 밭에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탄식과 화를 내신 이유는 돌처럼 굳어지고 무감각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둘째, <고침>을 위해 살지 않고 <고발>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3:2)
<고발하기 위해 사는 인생>이 있고
<고치기 위해 사는 인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지적하고 고발하고 질책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평생을 다른 사람의 쓰레기를 뒤지는 인생, 다른 사람의 약한 것, 부족한 것, 힘든 것을 내 밥상의 고발과 비판과 비평의 반찬으로 삼는 인생입니다. 쓰레기 인생입니다. 남들의 뒤로 나오는 쓰레기를 자신의 밥상에 찬으로 삼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고치기 위해 의사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고발하기 위해 칼을 들고 찾아갑니다.
주님은 고발하려는 저들의 의도를 아시고 일부러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십니다. 일부러 말입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정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 고발하려는 자들을 다시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고발하려는 저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선함이 무엇입니까? 선함은 우리의 쓰레기를 뒤지는 저들 앞에서 저들의 쓰레기를 같이 뒤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인생에 희망을 주고 이 세상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나를 통해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고발하고 지적하고 비판할 때 그 사람의 약함을 내가 안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발하는 자들의 인생이 약점을 고발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는 인생이지만 고침을 받을 사람에 대해서는 돌처럼 무감각하고 굳어진 마음을 보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죽이려는 것>과 <무감각 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3:6)
우리는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내가 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면책 이유를 찾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았으니, 아픈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가해를 하지 않았으니 나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를 죽이려 합니까? 바로 아픈 자들에 대해 무감각하고 굳어진 마음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죽입니다. 아픈 자뿐 아니라 아픈 자를 고쳐주려는 사람도 죽여버립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서로 반대의 이념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집단에 민족주의자들이고 헤롯당은 로마와 결탁된 정치집단입니다. 서로 늘 반대의 노선을 달리던 자들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정치적 색이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을 살리자는 한 시골의 선지자를 죽이는데 마음을 같이합니다.
살리자는데 마음을 같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죽이자는데는 마음이 금방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죽이는 사람이 됩니까? 완악한 사람들입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과 아픔을 겪는 사람에 대한 무감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지금은 무감각하지만 결국 고발하는 사람이 되고 고발 하는 사람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시>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처음 받았을 때 우리는 죽었던 영혼의 감각이 살아 났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 무감각한 내 모든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 모든 감각은 내가 세운 기준으로 무감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 귀신 들린자를 내어 쫓으시면 당한 어려움으로 다시는 그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다시'라는 말의 영어는 again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원어는 '진동하다'라는 말의 동일어에서 나왔는데 진동하다는 <씨름하다>와 같은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시'라는 말은 <씨름>하는 반복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간 것은 그냥 기분 삼아 간 것이 아니라 <씨름>하기 위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돌처럼 무감각하고 굳어진 마음으로 고발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픈 사람은 안중에 없고 고발을 잘함으로 비판을 잘함으로 나의 높음을 증명하는 인생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씨름하는 마음과 심정으로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 사람을 세우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시>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눈물 흘리는 자들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그 자리 말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발을 좋아합니다. 왜요? 저 사람을 고발해야 내가 맞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틀려야 나의 의로움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고발하고 지적함으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마음, 돌처럼 굳어지고 감각 없는 우리의 마음이 살아남으로 우리의 생명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도 구분을 못하는 세대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내가 정한 기준,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쉬운 질문에도 답을 못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고발의 인생을 향하여, 돌같이 굳어지고 무감각한 세상을 향하여 탄식하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과 마음을 절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직 한가지 이유!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서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떤 것이 악인지,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도 그저 아픈 자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지 못하는 나의 완악함과 죽어가는 저들을 향하여 무감각한 돌 같은 나의 마음 때문에 탄식하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저 죄송하고 마음 아플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늘 보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생각은 잘 알면서 나의 무감각한 마음과 변하지 않는 생각을 보지 못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의 마음…
나의 무감각이 결국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왜 세상에 눈물이 많은지 왜 예수님이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픔입니다.
고발하지 말고 고치는 인생을 위해 그 자리에 다시 서야합니다.
주님은 <다시> 내 인생에 오셔서 그 자리에 서 계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회복하시고 <씨름>하시는 주님의 인내가 우리를 다시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서야 할 자리에 서는 것!
그것이 <축복의 인생>입니다.
* 오기스교회 강대상입니다.
건축을 마치고 오래되고 다 떨어진 강대상을 사용했습니다.
한 집사님께서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부담이셨던 모양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꼭 이 강대상을 위해 헌금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기스교회 강대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국에서 선교지를 오든지 어떤 분들이 선교지를 오면 늘 지적하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늘 지적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매주 나오는 주보의 오타를 찾아 지적하고 시비를 거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열매를 위해 잘못된 것을 밝혀내고 시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발의 자리, 비판의 자리, 시정의 자리보다 고침의 자리에 서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지적을 하자면 한국 사람보다 잘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고발의 자리가 아니라 고침의 자리에 서라 하십니다.
한국에서 사역을 할 때 여러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행사를 마치면 저는 절대 평가회를 하지 않습니다. 평가회를 하지 않고 평가를 합니다. 종이를 미리 준비해서 다 나눠드리고 올해 좋은 점과 시정할 점을 기록하고 다같이 그 자리에서 써서 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행사부터 내어주신 평가지를 참고로 계획하고 일을 진행합니다. 평가회는 종이를 내고 난 다음부터 합니다.
잘 한 사람들을 나오게 해서 축복하고 격려하는 시간으로 평가회를 대신합니다.
우리는 지적하고 비판한다고 마음과 생각이 변하지 않습니다.
좋은 99가지를 두고 우리는 잘못된 한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이 무감각하고 돌 같이 굳은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적하고 고발하면 사람이 바뀐다 생각하고 조직이 잘 된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의 다른 말은 <짐을 내가 대신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지셨고
멍에지는 법을 내게 와서 배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
고발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지적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의 짐을 내가 질 때 그들이 변하고 그들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 놓으신 하나님의 답은 서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다른 말은 <짐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변화가 없고 은혜가 없는 교회,
내가 그 짐을 대신 지지 않고 고발해서 입니다.
<고발>하는 인생이 아니라
<고치는> 거룩한 인생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