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와 새 기준(막2:18-28)
내가 예수를 얼마나 잘 믿느냐는 것과
예수님이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늘 내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느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느냐는 늘 기준이 있습니다. <자기기준> 말입니다. 이 자기기준이 높고 그 기준에 따라 잘하면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늘 서글픈 마음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예를 들어 남들 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 하지 않는 어떤 형식과 법을 정해서 잘 지키면 나는 더 경건하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은 각종 예배는 물론이고 특별히 <새벽기도>와 <헌금>과 <봉사>입니다. 이 세가지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성도가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알게 모르게 경건과 신앙이 좋은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기준>은 오직 구원의 감격과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한 <드림>입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시는 이유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분, 죄인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과 함께 잡수시고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옥중에 있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왜 당신들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년에 4번의 금식일을 지켰는데 어느 순간 우리처럼 신앙의 기준이 더 들어왔는데 그것이 금식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게 되었습니다. 없던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철저히 지키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안 지키냐는 것입니다.
<기준>에 대한 첫번째 이야기는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는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서 길을 내고 잘라 먹은 것으로 예수님께 따집니다. 왜 안식일에 당신의 제자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이야기에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혼인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2:19)
우리의 기준은 신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주인공이지 손님들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신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기준이어야하는 혼인집에 손님들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신랑을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손님인데 우리가 주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서 금식이 기준이 되고 자기가 세운 기준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신앙은 은혜와 감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새벽기도와 나의 헌금과 나의 봉사는 누군가에게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죄 사함을 알고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 하지 못해 죄송하고 더 드리지 못해 마음 아프고 더 나누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준이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목회나 선교사에게 있어서 성공(?)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모든 목회와 선교현장을 자기의 <성공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름 자기 일이나 자기 분야에 말할만한 어떤 것이 있는 사람은 늘 자기가 잘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요구한 금식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더러운 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지내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이 따지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문제나 다 자기 분야에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기기준의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속에는 자신이 이룬 어떤 성공이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이루었고 내가 이정도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 의식>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가진 가장 무서운 칼은 다른 사람은 못하는데 나는 이정도 했다는 <업적의식>입니다.
어떤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은 어떤 일을 이룬것에 대한 업적의식입니다. 공로의식입니다. 업적도 공로도 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드린 종의 마땅한 <드림>입니다.
그런데 그 드림이 감사와 감격으로 시작해다 결국은 신랑은 사라지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둘째, 새것과 옛 것을 같이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 공로의식, 업적의식으로 기준을 삼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요구한 것은 옛것과 새것을 같이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 기준인 시대는 율법이 기준이 되어야하지만 이제는 율법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준이 된 사람들은 율법은 지켰지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신을 실천하고 살기위해 오신 새로운 법입니다. 이 새로운 법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진정한 기준으로 삼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 이면에는 늘 죄인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율법이 기준인 사람은 관심이 없고 오직 율법을 형식으로 지켜야한다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 죄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내 맘에 품고 그것이 기준이 되지 않으면 둘다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말고 새것에 붙이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말고 새 부대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천국의 백성이 사는 법은 이전에 가졌던 자기 기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기준으로 살아야함을 몇번의 이야기를 통해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기준이 무엇입니까?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 예수님과 충돌했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이 자기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중풍병자 이야기,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사건,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이야기, 금식이야기, 생베 조각을 옷에 붙이는 이야기, 새포도주를 어디에 넣느냐는 이야기, 혼인집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준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우리는 여전히 나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의 이룬 어떤 것이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룬 것이라고 고백도하고 간증도하고 이야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알지만 죄인을 용납하시고 사람을 위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늘 무례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보다 더 상식이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사랑하지는 않고 예수를 믿으면서 나보다 못하고 내 눈에 차지 않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긍휼과 섬김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완벽한 기준으로 사는 그 삶을 질책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형식도 중요하고 새벽기도도 헌금을 잘하는 것도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함께함의 마음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용납하고 그들의 약함의 나의 이룬 업적을 함께 나누는 <한 몸 의식>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한 몸 의식>이어야 합니다.
잘하는 나나 못하는 당신이나 하나라는 의식은 절대로 없습니다. 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런데 너는 너고 잘하는 나는 잘났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저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왜 우리는 못하는 어떤 사람을 향하여 질책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생각의 실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왜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하려 하십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0]
우리는 언제 내 기준으로 저들을 평가하지 않고 질책하지 않고 꾸짖지 않고 저들을 섬기는 자리에 서게 됩니까? <하나>라고 인식할 때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기도하셨던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오직 그분의 제자들의 <하나됨>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하나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나의 높은 기준을 이루어낸 신앙을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영광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착각입니다.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법은 오직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한 선교사님이 노년에 처음으로 케이프타운으로 일을 겸해서 여행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리서치목적으로 오신 선교사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지만 목회 평생에 두 부부가 여행을 가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계신 선교사님이고 할 수 있으면 저희가 모시고 여행을 갔으면 했는데 먼저 기회가 생겨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늘 그렇지만 마음을 함께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고 작지만 부끄러운 마음으로 작은 봉투를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가시는 선교사님은 필리핀에서 10년 가까이 선교를 하시다 오신 분입니다. 조용히 사모님께 드렸는데 이 일을 같이 가는 선교사님이 아시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날 인사를 하러 갔더니 필리핀에서 오신 선교사님 말씀이 그렇습니다. "저희 필리핀 선교 현장에는 이런 일이 없는데 참 보기 좋고 흐뭇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선교사들끼리도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노 선교사님께서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선교사님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신 선교팀이 놀랐습니다. 이유는 입당예배에 다른 선교사를 초청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후원교회가 선교를 잘 하는 선교사에게 선교후원을 뺏기기 때문에 아예 선교사와 후원교회가 만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아공 시골에서 혼자 사역을 하다보니 다른 선교사님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역을 하시는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상식으로 그저 예수 믿는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잘 못해드리는 것이 죄송한 마음으로 빚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필리핀 선교사님께서 필리핀은 그렇지 않않은데요라는 말씀에 저는 그렇게 답했습니다. 남아공은 다 그렇게하고 사시는데요… 제가 아는 남아공의 선교사님 제가 아는 많은 분들은 그렇게 하고 사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이 목회를 잘 하는 건지 잘 모릅니다.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선교를 잘 하는 건지 할 수록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목회든 선교든 성도의 삶이든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세상은 나 개인의 축복을 부추깁니다.
세상은 옆의 이웃이 어떠하든 내가 잘 되는 것에 목숨을 걸게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이 배가 고파 죽어가고
이웃의 성도가 이웃의 친구가 인생의 짐으로 쓰러져가는데
오직 우리는 나의 축복만, 나의 기준만 중요합니다.
때로 엄격한 기준으로 훈련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인생은 훈련보다 너와 나가 하나라는 마음을 심어줄 때
우리는 어떤 훈련도 기쁨으로 감당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 30이 넘은 제자들에게도 매를 듭니다.
몇 년을 사귄 여인들을 불러 영적으로 도움이 안되면 당장 헤어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과 나의 사이가 하나라고 느낄 때까지 그 말을 아껴둡니다.
하나라고 느낄 때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쓸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되지 않고 받은 축복!!!
나보다 못한 자들을 질책하는 칼이 되고
혼인집 신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됨>
힘써 지켜야 할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 배목사님과 정목사님과 함께 사역자 미팅 모습입니다.
선교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한가지는
저와 사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사역을 한들 사역자 한 사람과 한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본질이 아닌 것은 서로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멀리서 보기에 아무리 그럴싸한 사역을 한다 한들 가장 가까이서 함께 사역하는 사람,
함께 생활하는 사람과 하나되지 않는 사역은 성도는 속일 수 있지만 세상을 속이지 못합니다.
세상을 속일 수 있지만 성도는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우리의 업적과 자기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하나되지 않고 전부를 다 하려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회개 할 것!
내가 세운 기준만큼 열심히 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내 열심의 기준 때문에 우리가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