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잔치(막2:1-17)
무엇이 진정한 기쁨인지 구분이 안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건강한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모든 기쁨을 다 잃어버립니다. 아이입니까 성적입니까? 남편이 돈을 못 벌어오고 능력이 없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돈입니까 남편입니까?
세상의 영이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그 혼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를 혼돈케 합니다. 일이 중요합니까 사람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교회의 일을 하다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열심을 내다가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람을 아프게하고 사람을 힘들게합니다. 우리의 일의 본질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일을 통해 사람이 남는 것이지 사람을 희생하면서 일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늘 일을 하시기 전에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중병이 기적적으로 나은 것이 기쁘십니까 죄에서 자유 한 것이 더 기쁘십니까? 주님을 병 고치는 사람으로만 제한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오늘 주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상한 일을 벌이십니다.
한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네 명의 친구가 침상을 둘러매고 지붕을 뜯어 내렸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병이 나았다라고 해야 하는데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2:10)
일어나 걸어가라 라는 말과 죄를 사했다는 말이 어떤 것이 더 쉽습니까?
죄 사했다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는 것은 병이 낫게 하는 것이어서 능력이 필요하고 죄 사함은 말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병도 낫게함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왜 주님이 죄를 사한다는 말을 먼저 하셨습니까? 주님은 병을 고치시지만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의인된 자들과 함께 거하지 않고 오직 죄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오늘 본문 후에 그 모습들을 성경을 기록합니다.
첫째,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 마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본심은 병을 낫게하는 것속에 죄인들을 고치시고 사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왜 능력이 있는 저분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입니다. 주님께서 그 이유를 그 유명한 말씀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2:17)
그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바로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왜 당신은 그런 자들과 함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기쁨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주님이 왜 왔는지 말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권세가 있음을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엇인 우리의 기쁨입니까? 세상적으로 병이 낫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사업이 잘되고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자꾸 올라가는 것입니까? 그것도 기쁨이겠지요. 그러나 기쁨의 본질인 죄를 사함받고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처음 주를 만났을 때 고1 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내 안에서 남는 한마디는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는 내가 영원히 죽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해결해 주시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통곡했고 눈물을 흘리고 밤을 세워 애통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기쁨에 못이겨 지금까지 감격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뭔가 놀라운 일이 기적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뭔가 내 인생에 놀라운 축복을 기대하며 주를 부릅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죄 사함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감격이 우리에게 사라지면 우리에게는 죄인도 안보이고 세리도 안보이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도 안보이고 오직 병을 고치며 높아지게 하며 세상적으로 유명하게 하는 주님만 보입니다.
주님은 작은 자(중풍병자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에게,
죄인들에게
세리들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고치고 낫고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커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 다릅니다.
기쁨의 이유가 다릅니다.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기쁨이 충만하다 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죄인이 돌아오는 기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애통이 없고
작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기쁨이 없습니다.
죄인 돌아오는 기쁨이 우리에게 회복되야 합니다.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셔서 보내시는 주님의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 기쁨의 본질입니다.
나의 자녀로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고 못 하고에 인생의 기쁨이 달라지는 세상 풍조에 우리의 기쁨을 다 잃었습니다. 아이의 건강을 잃은 부모는 이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의 회개에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지는데 우리는 다른 기쁨에 인생을 허비합니다. 천국과 상관없는 기쁨에 일희일비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의 조건은 천국에서 잔치의 이유가 아니라 잔치의 작은 반찬 정도됩니다. 잔치의 본질인 죄인의 회개와 죄인과 함께함과 죄인이 돌아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과 상관 없이 작은 멸치 반찬 하나에, 작은 깻잎 반찬 하나에 인생을 걸고 살아갑니다. 코미디입니다. 우리는 심각한데 천국에서는 코미디를 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교회에 주신 이 영광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시끄럽습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입니다.
시끄럽다고 요동하지 맙시다.
말이 안 통한다고 도망하지 맙시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교회가 시끄러운 것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우스운 것은
죄인을 부르지 않는 교회입니다.
죄인에 마음이 없는 교회입니다.
죄인과 함께한 주님인데 죄인을 멀리하고 죄인을 향하여 가지 않는 우리가 이상한 것입니다.
이상한 것을 정상으로 여기고
정상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오늘도 새겨야 겠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그래서 나와 같은 죄인들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서 또 내 손을 내 밀어봅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 전도를 갔습니다.
한 가정에 들어갔습니다.
온 가족이 술병을 들고 노래를 틀고 술에 취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은 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술 냄새가 진동하고 상식이 안 통하는 이런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이 오래되고 목사가 되니 고상한 사람만 만나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아버지도 내 어린 시절 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신 아버지를 보는 것이 늘 두려움이었습니다.
무서움이 아니라 혹이 비틀거리다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아버지를 누군가가 붙잡아 주었으면
누군가가,
예수님처럼 다정하게 대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그리고 복음을 알게해 주었다면 아버지의 인생이 많이 달랐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늦은 나이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 박정희권사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늘 아버지를 붙들고 기도하셨고
전도하셨고
오며 가며 가난한 살림살이에 먹을 것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수년을 교회 열심히 다니시다 천국에 가셨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누군가의 남편이
누군가의 가족이 지금도 상식없는 삶,
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누군가 친구가 되어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천국에서 하늘 잔치가 벌어지지 않을까요?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지 않겠습니까?
기쁨!
내 것을 채울 때가 아니라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필요를 채울 때입니다.
천국은 나의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 아니라
친구의 기쁨을 채울 때 나도 덩달아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늘 잔치가 베풀어지는 참 기쁨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