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그늘 (막1:40-39)
우리는 나의 탁월함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나의 선행과 나의 특별함을 알고 그것을 온 세상에 소문 내 주기를 기대합니다.
알려지고 드러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목 받고 집중 받는 것을 늘 기대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알려 짐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모두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도 고쳤습니다. 그리고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0)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병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자신의 병을 고칠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 말에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개인이 병으로 고생한 아픔과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나서부터입니다.
첫째, 내가 얻은 기적이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 시켰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나가 얻은 병 고침이 예수님의 사역을 제한 시키다니요? 놀라운 믿음의 고백으로 병을 나은 나병환자가 자신의 고침을 온 세상에 알리고 다녔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라고 내가 나았다고 수 없이 전파했습니다. 말하고 또 말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구원을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나의 구원을 간증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내가 만드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 때문에 예수님의 일하심을 제한시켜 버렸습니다. 그 한 사람의 말이 예수님이 다시는 그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1:45)
내가 받은 구원, 내가 경험한 기적을 말한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예수님이 다시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동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 후에 그 동네에는 고침을 받은 사람은 한 나병환자가 끝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의 말이, 내가 받은 구원과 기적이 마지막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 나병환자는 자신이 얻은 이 놀라운 기적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이 고쳐주셨고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간증이 결국 나병환자가 그 동네에서 마지막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방향보다 중요한 것은 <울타리>입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어찌 보면 예수님이 일하심을 더 많이 막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이 고침 받은 경험과 자신의 순수한 신앙으로 얻은 의로움이 결과적을 예수님이 사역하는 걸림돌인지 모릅니다. 오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그 동네에 그 한 나병환자가 마지막 은혜의 사람이 됩니까? 왜 예수님이 일하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울타리는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나병환자는 자신이 고침을 받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네를 바꾸기 원하시는 예수님을 일하게 하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나를 고침 받는 기적 정도는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동네를 고치시며 사람을 고치시기 원하시는 예수님을 알 하게 하는 믿음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고 <곧>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1:43)
이 <엄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심판과 관련된 말씀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만큼 엄하고 중한 내용을 말할 때 '엄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 좋은 나병환자를 잘 고치시고 그리고 곧 엄히 경고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1:44)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병환자를 보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에게는 각자의 보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병환자에게 당부한 보냄의 내용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경험한 기적의 근거를 나의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속에 살면서 내 믿음의 근거로 얻은 구원을 말하며 또 내 마음대로 믿음 생활을 이루어간다는 말입니다. 기적을 얻는 것 까지는 좋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믿음의 방법이 결국 온 동네에 구원과 기적을 끊어내고 예수님이 일하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원흉이 되어버렸습니다.
왜요? 내 맘대로 믿어서 입니다.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당부는 안중에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제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기적을 경험했고 내가 구원을 얻어 병을 나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말의 주체가 되고 내가 소문의 근원지가 되어서입니다.
우리의 하는 신앙과 간증과 소문의 울타리는 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병을 고쳐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엄히 경고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것이 내 신앙의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울타리는 내가 그 안에서 자유를 줍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역도 존중받게 하고 침범 받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침과 기적과 구원을 주시면서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선을 정해주십니다. 믿음의 터를 정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만난 그 감격, 내가 이룬 그 축복의 방법을 온 세상에 이야기하고 강요하고 요구합니다. 개인은 개인이 얻는 구원의 길이 있고 온 동네가 구원을 얻는 예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 개인에게 믿음으로 은혜를 베푸시지만 온 동네가 구원 받는 길도 제시해주십니다. 사회가 구원을 받고 나라와 민족이 구원받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길에 나의 일은 주님이 주신 보냄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온 동네가 구원 받는 길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에게 엄히 경고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오직 내가 얻은 구원만 말하고 싶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구원이 좋아서 내 방법대로 또 그것이 하나님이 좋아 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주님이 주신 믿음의 울타리,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 일합니다.
저는 그런 신앙을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선
<믿음의 그늘>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가진 믿음에 근거한 소문을 내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임할 구원을 방해합니다.
남아공은 백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믿음의 열매를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잊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울타리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이 땅의 축복을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누렸습니다. 마을을 세울 때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중심으로 온 도시가 길을 내었습니다. 중심 도로의 이름은 church street입니다. 믿음을 통해 얻은 이 땅에서의 축복이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으면 흑인을 억압하고 자기들의 믿음의 스타일로 이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의 전세계 강도 강간 도둑이 최상입니다. 일년에 도둑과 강도 건수가 1억 건입니다. 다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선 믿음의 그늘입니다.
말할 자격이 없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감격과 축복을 온 세상에 알립니다. 그런데 말씀의 울타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좋아 개인은 구원의 감격의 과거가 있지만 울타리를 넘어선 개인의 믿음의 고백과 소원과 삶의 스타일이 결국 온 동네에 예수님이 일할 기회조차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열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열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방향이 잘 못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각자에게 말씀하신 말씀의 울타리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그늘>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도 때로는 주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온 나라가 온 교회가 받은 은혜와 구원을 말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향하여 아픔만 늘어놓습니다.
이해합니다.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고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힘든 거지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때로는 이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내가 잠잠해야
주님이 일하시기에 편하지 모릅니다.
다들 의로움으로
다들 걱정으로
다들 믿음의 뜨거움으로 달려가지만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래야 주님이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못하면 믿음의 기적과 축복이 내가 마지막이 될 수 있습니다.
왜요?
말씀의 울타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좋은 믿음이 그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때로 주님은 증인이 되라 하시지만
때로 주님은 주님의 때를 위해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시기도 합니다.
엄히 경고하시는 말씀의 울타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 목욕도 목욕통 안에서 해야 합니다.
목욕통을 넘어서면 목욕이 안되지요.
은혜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결국 내가 드러나지 주님이 일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그 좋은 것을 통해
주님이 온 동네에 못 들어 오시고 일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 됩니다.
종은 오직 말씀의 울타리 안에 거할 때 종입니다.
종을 넘어서 온 동네에 주님을 전한다고 말하고 다니며
자기의 스타일의 신앙생활로 주님이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우리 삶의 울타리는 주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