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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름과 흐름

머무름과 흐름

 

 

 

 

 

 

 

머무름과 흐름 (1:21-39)

 

당신은 거기에 계십니까?

이유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머물면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가는 대로 가게 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머무름>

목적을 가지고 갔지만 사람들이 가는 <흐름> 맡기면 결국 나를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가지를 읽어야 합니다 .

 

첫째, 내가 곳에 머무르는 이유입니다.

 

인생은 소풍입니다.

내가 소풍을 왔는지 싸우러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풍을 왔는데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소풍인데 말입니다.

내가 여기에 머무르는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귀신이 먼저 알아봅니다.

가만히 가르치고 있는데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자가 먼저 알아봅니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어둠이 먼저 빛을 알아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복음이 시작되고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았고

그리고 아픈 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고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람들이 <모인다> 것입니다.

그런데 모임이 사람을 흥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우리는 흥분합니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몰려드는 사람으로 인한 흥분과 집중 받는 흥분을 사람들은 참지 못합니다.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다 나타나는 증상은 내가 < 여기에 머무는지> 잊어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지 않으면 우리는 나의 존재됨,

내가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 깊이 묵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서슴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홀로 있을 때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높여줍니다.(24)

사람들이 이런 권세가 어디 있느냐 칭찬합니다.(27)

소문이 여기저기 퍼집니다. (28)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보기를 원하여 많은 사람이 나에게 집중합니다.(33)

모두다 나를 찾습니다. (37)

 

 

우리는 이때 무너집니다.

무엇에 대하여 무너집니까?

내가 여기에 머무는지에 대한 <자기 정체성>입니다.

 

일들이 있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자신이 여기에 왔는지 여기에 머무는지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1:38)

 

자신이 여기에 왔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기 정체성이

사람들이 나를 휘두르는 흐름보다 커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 사람들이 나를 밀치는 힘보다 커야 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리에 계셨다면

아마 예수님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흥분에 마음이 힘드셨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홀로 있으셨고

새벽 밝기 전에 혼자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을까요?

많이 사람들이 몰려 오도록 기도하셨을까요?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그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러나 오늘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여기에 머무는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확고한 확신을 위해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이전에 내가 여기에 왔는지 명확한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아침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1:36)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는데 예수님은 혼자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서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입니다.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7)

 

제자들이 예수님을 아침에 찾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서>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흥분합니다.

아마 예수님도 자리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같이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흥분의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왜요?

사람들이 몰려오는 자리에 있으면 내가 여기에 있는지 잊어버려서입니다.

<밀집성>에는 정체성의 <공간> 부족합니다.

 

 

쥐를 가지고 실험했습니다.

적당한 공간을 두었을 때와 개체가 많아서 밀집성이 높을 때와 비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공간을 잃은 쥐들은 몰살을 했습니다. 자기 공간이 사라지는 밀집성이 높은 집단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자기 정체성을 확보할 공간이 없어서 결국은 몰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 아셨습니다 .

사람이 몰려 수록 예수님은 혼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1:38)

 

 

예수님이 여기에 머무르는 이유는 오직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전하기 위해서 머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쌓이고 사람들이 몰리면 다시 전하기 위해 자리를 피하십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듦으로 말미암는 <흥분> 피하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여기에 왔는지 <방향> 잃어버립니다.

 

둘째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 흐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밀집성에 집착하고 밀집성에 취하면 흐름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여기에 머무르는지 때는 알았는데 사람들과 사이에 공간,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 날마다의 홀로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방향 흐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룰 위하여> 왔다고 하십니다.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본인의 방향, 사역의 흐름을 예수님은 스스로 잃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말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일을 위하여 왔다고'

 

일이 무엇입니까?

<진리>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18:37]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전도하러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진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8:40)

 

예수님은 진리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신 이유는 존재론적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결국 그분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머무름의 이유는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사람을 모음이 목적이라 여깁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이면 떠나셨습니다.

왜요?

진리를 증거하고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머무는 이유이고 머물지 않고 떠나는 이유입니다.

 

떠남도 머무름도 문제가 아닌 것은 떠나나 거하나 우리의 이유는

오직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오늘 거기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 머무름의 이유인지 모릅니다.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에 머무르고

모든 사람이 주를 찾으니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제자들처럼

우리의 머무름과 자기 정체성을 사람들의 <몰려옴>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 동네 사람이 앞에 <모였더라>"(1:33)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7"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오고

사람들이 나에게 집중하는 인생을 꿈꾸십니까?

<머무름> 방향과 흐름을 잃어 버리면 우리는 결국

사람들이 <모였더라> <찾나이다> 흥분하는 인생이 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은 '모였더라' '찾나이다' 아니라

모여도 떠나고

찾아도 떠나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목숨을 몸부림이며

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에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망하여

자기의 가는 <방향> <흐름> 잃지 않았습니다.

 

<모였더라> <찾나이다> 아닌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는 명확한 자기 선언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 드롱콥교인들이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찬양의 밤에 초청되어 3시간을 달려 참석을 했습니다.

한인들만의 찬양이 아니라 선교지 교회를 초청해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교제를 가집니다.

드롱콥교회는 지금의 사역자 전에 있던 사역자가 무당에게 총을 맞아 순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때에 성도들은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보였습니다.

아무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사역자를 죽이라고 사주한 무당이 교회 바로 앞에 집을 짓고 위협을 해도

주를 향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입니다.

그들의 찬양,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역자가 왔다고

순교의 각오로 죽음의 각오로 사역자가 너무 감사하고 좋아서

하루 일당을 모두다 헌금해서 귀한 목사님들까지 초청해서 교회 잔치를 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에도 도망하지 않고

죽음이 각오로 사역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입니다.

돈이 없지만

일이 없지만

주님 한분만으로 땅에 내가 존재하는지 알고가는 성도들입니다.

함께 땅을 파고 교회를 짓고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교회를 세웠던 아름다운 동역자들입니다.

 

아름다운 저들의 찬양의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저들의 신앙과 믿음으로

아침은 감동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어제 선교지로 가는 내내

행복이다 행복이다 마음으로 외치며 다녀왔습니다.

 

외로운 ,

홀로 가야 하는 눈물의 길이지만

그들의 믿음의 열매를 보며 오늘도 감사와 감격의 눈물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