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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변화 복음의 시작

시선의 변화 복음의 시작

 

 

 

 

 

 

 

 

 

 

 

시선의 변화 복음의 시작 (1:1-20)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여인이 낳은 중에 가장 자는 세례 요한 입니다. 
세례요한
보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까요?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요한보다 이가 없었을까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서입니다.

여인이 낳은 중에 하나님의 아들을 준비한 사람은 요한이 유일합니다.

자를 섬기는 ,

세상에서 가장 자를 섬기는 자는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

유명한 사람을 섬기든지 가까이 하든지 그런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을 준비하고 섬겨서입니다.

이야기가 마가복음의 시작입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1:2)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1)

 

복음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세례요한은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세례요한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준비하고 그분이 일하시기 위해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 싶어합니다.

 

왜요?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고 하나님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시작이 되었던 세례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열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사람이 세례요한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보다 작다고 하십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여인이 낳은 자중에 자가 되고 싶어서 살아가는데

주님은 세례요한처럼 사는 것은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보다 작다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의 길을 직접 예비하고

그분을 전하고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보다 작은 자가 되는 일이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자가 천국에서 이렇게 작은 자가 되는 것일까요?

 

 

첫째, 섬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섬기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여인이 낳은' 이라는 말은 '세상의 원리, 세상의 법칙으로 보면' 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대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대사입니다. 한문도 ()자를 사용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례요한은 가장 하나님의 아들을 섬겼으니 이보다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까지는 예수님이 인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보다 작다고 하십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입니다.

 

같은 광야입니다.

장소는 같지만 사람에게 광야의 의미가 다릅니다.

 

세례요한의 <광야> 한마디로 세상에서 <가장 사람> 섬기고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광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 섬기기 위해 준비하는 곳입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에 이어 바로 나오는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소리가 났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1:11)

 

예수님의 광야는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해 준비한 곳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 입니다.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해 자로서의 <자격을 버리는> 곳입니다.

 

사람은 광야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는 곳이고

사람은 광야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을 섬기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천국의 원리입니다.

천국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천국의 원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음 사건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16)

 

그것도 갈릴리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여인이 낳은 자라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가장 엘리트를 불러서 예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변방의 이름 없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어부들을 보셨습니다.

 

 

 

평생을 광야에서 약대 털옷과 석청을 먹으면서 헌신해온 삶이 가장 작은 자랍니다.

극히 작은 보다 작은 자랍니다.

뭔가 문제입니까?

평생 주를 섬기고 주를 위하고 목숨 걸고 헌신 했는데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랍니다.

 

왜요?

< > 섬겨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사람을 섬길 수록 천국에서 나의 자리는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중에라는 세상의 법칙에 반대를 향합니다.

갈릴리로…

어부에게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였습니다.

천국의 원리를 사신 주님이 주목하여 보신 것은 작은 자들인 어부였습니다.

손으로 던져서 잡는 작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능 적으로 자를 향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내가 높아질 있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의 위대함은 가장 자를 섬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라 칭하는 자는 천국에서 극히 작은 보다 작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에게 주목하여 보지 않고

작은 자들에게 그분의 눈길을 주십니다.

<보시니>입니다.

16절에 시몬과 형제 안드레를 그렇게 <보시니>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시 19절에 야고보와 요한을 다시 보십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1:19)

 

 

예수님은 사역하시기 전에 <보시니> 과정을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세례요한은 평생 기다리고 보며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말입니다.

가장 ,

가장 위대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의 원리로 보면 가장 작은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한 사람은 작은 자들입니다.

너무 초라하고 여인이 낳은 중에 가장 초라한 사람들…

죄인과,

세리와,

어부들과,

창년들입니다.

 

주님이 가졌던 <보시니> 은혜는 바로

그분의 시선이 가장 작은 자들에게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작은 자들을 부르시면서 부름의 목적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17)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작은 >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을 섬겼던 세례요한은 가장 작은 자가 되고

가장 작은 자를 섬겼던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여인이 낳은 자중에'라는 세상의 원리가 우리 뼈속 깊이 박혀있습니다.

자를 섬겨서 나도 자가 있다는 원리로

우리는 목숨을 걸고 광야에서 조차도,

약대 털옷을 입는 것도

먹을 것이 없어 석청을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

예수님을 섬기므로 커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무 아십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님은 낮은 자로 본인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친구도 제자도 만나는 사람도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작은 사람들,

사람이 주님이 부르시는 사람이고

주님이 우리로 가게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못하면 <보시니> 은혜가 눈길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높고 가이샤랴 빌립보가 보입니다.

황제의 도시,

자리,

사람이 보입니다.

 

자리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섬김으로 얻는 세상적 유익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선은 작은 자들을 <보시니> 은혜로 찾아오십니다.

작은 자중에 작은 나를 <보시니>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의 위대함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셔서

자가 아니라 작고 작아 눈에 보이지도

인생이 무의미 같은 작은 자들에게 시선을 머물라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졌던 <보시니> 은혜가 나에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에 합당한 자는

자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니라

작은 자를 바라보는 <보시니> 눈길이 나에게 있을 우리는

믿음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마지막에 주님께 질문합니다.

기다리는 그가 당신입니까?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사람을 기대하고 사는 인생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16)

 

왜요?

주님이 향하는 곳은 <사람>입니다.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 있는 ,

섬기는 사람이 세상적으로 사람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도 없고

세상이 거부하고

세상이 외면하는 아픈 자들

영적으로 절름발이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섬기면 나도 초라해질 있는 사람들입니다.

 

위대함을 꿈꾸고 위대한 주님을 섬기면 실망합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인이 낳은 중에 가장 자이나 것을 기대해서

자신의 마지막은 가장 초라하게 사라져가는…

오실 그분이 당신인지 아닌지도 의문의 질문을 갖는 마음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이 알아주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약하고 작은 자들입니다.

그곳에 주님은 <천국의 비밀> 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말씀은 세례요한이 극히 작은 자라고 하신 말씀 바로 뒤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오해합니다.

자를 섬기는 천국이라고…

그래서 천국을 침노하지 못합니다.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우리의 <보시고> 주님의 시선과 달라서입니다.

 

아는 자만 침노하고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의 원리의 반대로 침노합니다.

자를 섬기는 큰 자로…

아닙니다.

천국의 침노는 <작은 > 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영광>입니다.

 

복음의 시작…

<보시고>입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14,15,16 구역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인교회 찬양의 밤이 겹쳐서 박수남집사님과 부인집사님만 오셨습니다.

귀한 선물과 준비한 음식과 귀한 섬김과 사랑으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전도를 나갔습니다.

집을 돌다가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자고 말하고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에 초청을 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인생,

부적을 지갑에 넣어서 가져 다녔던 인생…

의미 없는 초라한 나의 인생을 주님은 <보시니> 은혜로 불러주셔서

이렇게 사람 낚는 어부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어제는 고기를 잡는 아이들 향했습니다.

 

작은 이들에게도 저에게 주어진 주님의 <보시니>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의 시작 <보시니>입니다.

복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보시니> 통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에게 <보시니> 은혜로

함께해주신 14,15,16 구역에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