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마지막 물음(마28:1-20)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부르셨지 우리를 증명하라 하시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늘 힘을 내서
나의 <어떤 일>을 이루려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께 힘을 달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28:6)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보여주고 확인 시키고 싶은 것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가서 이것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28:8)
복음이 힘이 없는 이유는 부활을 증거하지 않아서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증인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신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증언하지 않아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반석을 깨고 나오신,
부활하시고 영생을 주신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장 먼저 보고 경험한 영원한 생명이 된 나 자신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나의 나된 것을 알고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려는 것보다
나의 능력을 <증명> 하려 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지 못하고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데 우리의 인생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증인이 되려면 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 난 것을 봐야 증인이 됩니다.
보지 못해서,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해서
우리는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영생을 얻었는데
영원한 생명수를 먹는데 우리는 기쁘지 않습니다.
왜요?
여전히 <증인>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데 인생을 보내서입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셨는데
우리는 늘 내가 받으려 합니다.
그것을 인생 가운데 확인하려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보내시는 곳에 가고
가라는 곳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안 계신 주님,
내가 만난 부활한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입니다.
증인이 되야 합니다.
나를 증명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은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높은지 말입니다.
부활한 주님,
영원한 생명수를 만난 사람은 영생을 알기에
세상의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보다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 부활에 대한,
영생에 대한 확신 없이 살면 반드시
<자기를 증명>하는 인생이 됩니다.
마태복음 28장은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과
주님의 부활을 거짓으로 증언하고 자기의 힘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여인들뿐 아니라 군병들도 부활을 보았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28:11)
그것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렸습니다.
여이처럼 군병들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은
나를 증명하는 돈 앞에 무릎을 꿇어서입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28:12)
돈은 자기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돈을 보면 내가 주인이 되고 싶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증인이 되기 싫습니다.
오늘성경은 또 몇 가지 대비를 합니다.
<여인>과 <군인>들
<천사>와 <대제사장>,
<부활>과 <돈>,
그리고 <주님의 증인>과 <자기의 증인>입니다.
증인이 되는 걸림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인도 군인도 똑 같이 빈 무덤을 보았지만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위한 인생은 절대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대제사장과 군인들입니다.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 드러나고 싶은 다른 것이 있어서입니다.
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입니다.
그것은 <나>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돈을 사용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돈을 받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증인의 걸림돌은 <돈>입니다.
좀더 명확하게 말하면
돈을 통해 지키려는 <나>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나의 존재됨을 <영원>으로 인식할 때
세상의 돈이 나를 이끌지 못합니다.
내가 누군지 그때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사람,
자기의 힘과 권력을 지키기 위한 사람은 늘 뒷거래가 있습니다.
그 뒷거래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
내 안에 거한 영생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면 우리는 윤리와 어떤 사람들의 감동된 이야기에
울고 웃는 낮은 수준의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의 절대 기준은 부활을 통한 영생입니다.
그 기준이 우리 인생의 기준입니다.
그것을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세상은 <두 가지> 일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인생,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고 나를 <증명>하는 인생입니다.
복음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는 늘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삼위하나님은 수 천 년을 기다려서 이 일 하나를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 일이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 일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겨우 영화이야기,
겨우 교훈적 예화와
겨우 교훈적 감동의 이야기로 그 부활과 영생의 이야기를 대신합니다.
내가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본 사람이 없으니 말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영생의 확신과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달려갑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28:8)
부활을 본 자는 앉아 있지 못합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걷지 못합니다.
부활을 본 자는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지 못하니 말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봐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난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을 잊어버리고
나를 증명하고 나의 힘을 세상에 보이려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증명하려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권세와 능력은 내가 증언할 때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려 해서 안됩니다.
온 교회가 내 능력을 증명하려 합니다.
높아지고 커지고 이름을 내고 자랑을 합니다.
주님의 부활,
주님의 살아나심이 내 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보이고
그것이 깨달아지고
그것이 내 안에 찾아 올 때 우리는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걷지 못하고 뛰게 됩니다.
부활이 믿어져야 시작입니다.
부활이 내 것이 되어야 달려갑니다.
언제 교회가 타락합니까?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 <나의 증인>이 되면 타락합니다.
내 안에 내 꿈과 뜻을 이루려는 열정이 강합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의 부활과 영생을 전하는 열정이 강하십니까?
쇠퇴하는 기독교는 주님을 중언하지 않고
나를 증명하기 시작할 때부터 입니다.
나의 지식을 증명하고
나의 학력을 증명하고
나의 경력을 증명하고
나의 열매를 자랑하고
나의 높아짐과
나의 커짐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증거는 없습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
수 천 년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부활과 성령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겉으로 화려하지만 속은 허전하고
그래서 교회는 사람은 많이 모이지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한 것은 주님의 부활 후부터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부활을 본 순간부터가 아닙니다.
반석이 깨진 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온 물을 마실 때부터입니다.
영생의 샘물인 성령을 경험한 때부터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내 것이 되는 것은
내 안에서 생수 되신 성령이 우리를 이끌 때부터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필요에 따라 <끌어오지>
성령의 이끄심에 <이끌려>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성령께 간구하는가?
아니면 성령이 이끄시는 바를 따라 나를 쳐서 복종하는가입니다.
부활후의 사람들은 이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주님의 명령에 이끌려갑니다.
천사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자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28:7)
주님은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보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28:10)
부활을 믿는 자만 주님의 음성에 <이끌려>갑니다.
우리는 부활을 보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이유는 부활의 증인,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
<나의 증인>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대제사장들처럼 말입니다.
부활을 알지만 부활을 본 군병들을 통해 지식을 가졌지만
그 부활이 내 것이 되지 못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처음은 주님의 증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나의 증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주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에게 유일하게 당부한 것은
가나안에서 잘 되고 형통할 때
결코 너희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힘들때는 은혜를 구하지만
편해지고 넉넉해지면 결국 나를 증명하는 것에 인생을 걸게됩니다.
힘들다 힘들다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잘살고 형편이 나아졌는데 왜 힘든가?
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서입니다.
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서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부활을 통한 영생을 증언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마르지 않는 영생을 잡아야 합니다.
부활을 보고
부활을 믿으면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본 자는
경험한 자는
본 것,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됩니다.
증인은 내 안에서 영생이 되시며
영생의 길이 되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이끄심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보고 믿고 영생을 얻은 자의 <새로운 인생>입니다.
마태복음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나를 증명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부활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
그리고 본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결국 성경은 우리의 할 일을 말합니다.
부활을 말하는 것,
오직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사십니까 증명하기 위해 사십니까?
그것이 성경이 던지는 <마지막 물음>입니다.
* 고사리입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고사리가 선교지 가는 길가에 피어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겨울에 태워진 길가에만 새로운 고사리가 신선하게 올라옵니다.
몇분의 교인들에게 전했더니 선교지를 오면서 고사리를 한참을 뜯었습니다.
소문은 소문을 내서 고사리가 있는 선교지로 오는 한인교회 구역은
선교지가 바뀌면 프리미엄을 붙여서 바꿔야한다고합니다.^^
고사리를 보면서 부활을 봅니다.
다 태워진 땅에 어김없이 올라오는 고사리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이 생명이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일은 그저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소문을 내니 가치가 올라가고 가치가 있으니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부활에 어떤 일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본 것,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광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일은 그저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작은 풀 한 포기 생명 하나에도 하나님의 부활을 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붓을 들었습니다.
반석을 깨고 물을 내듯
반석의 돌을 깨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말하는 <증인>말입니다.
우리는 증인이 되어야지 나를 증명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이 증명하려 합니다.
교회가 증명하려 합니다.
증명이 아닙니다.
<증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