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하나님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하나님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하나님 (27:54-66)

 

없이 상징으로 말씀하셨던 한가지!

<반석> 깨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것은 물입니다.

광야에서,

인생의 광야에서 있는 가장 기초는 물입니다.

물이 없어 죽어가던 백성을 살린 하나님의 방법은 반석을 깨서 물을 내는 것입니다.

반석을 깨고 물을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입니다.

그런데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의 수를 막으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인 반석에서 물을 내는 앞에

자신의 감정을 넣고

자신의 마음을 넣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는 소리를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민20:10]

 

일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수에 자신의 감정과 걸림이 되어서입니다.

 

반석을 깨고 물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일을 다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무덤을 돌로 막으려 합니다.

경비병을 세워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려 합니다.

 

모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막은 것입니다.

반석을 치기는 치지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며 자신의 감정을 넣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보다 앞서는 것은 우리의 감정입니다.

<진리> 반대는 진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감정보다 무서운 것은 <논리>입니다.

<믿음> 반대는 <논리>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27:63)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자신들 만의 논리로 접근합니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덤의 돌문을 막는 것입니다.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결국 <>입니다.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은 권력을 이용하고

힘을 이용해서 하는 것은 논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과학입니다.

과학의 길은 한가지 가설을 세우고 가설이 증명되는 , 천의 연구를 통해

한가지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언어는 논리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논리로 풀지 못합니다.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풀립니다.

 

절망이라고 여겨질 ,

소망이 없도 답이 없다고 여겨질

믿음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자신의 무덤에 넣어두고 돌로 무덤을 막습니다.

그런데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입니다.

 

오늘 27장에서 바위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빌라도의 법정이 <바위> 위에서 행해졌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나타난 징조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바위> 터졌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은 <바위>안이고 안에

예수님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바위는 <페트라>라는 원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반석>이라고 사용하시는 단어가 바로 <바위> <반석>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이 반석이시지만

반석을 깨시는 하나님의 미리 보여주신 그림자를 실체로 보여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은 결국 반석을 깨고 나오셨던 구약의 생수와 같은

주님임을 증명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오직 반석을 깨고 나오는 생명수라는 의미입니다.

반석이신 자신을 쳐서 반석을 깨고 나오는 주님을 신약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반석을 깨고 나오셨음을 보여주셨고

반석 자신이 스스로 반석이 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실체인

반석을 깨고 나온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말씀하신 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은

죽음을 이기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우리는 만나만 생각하고 반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석을 깨고 물이 나온 것이 광야의 시작입니다.

물이 생존을 결정합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수 되신 성령이 나오십니다.

성령을 통해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반석의 핵심입니다.

 

반석을 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에서 생수가 나오는 ,

생수를 내가 누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생수를 먹지 못하면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주님은 오늘 무덤에 갇히시고 일을 기다리는 시간에

바로 세상의 논리와 감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건인

반석을 깨고 생수를 내시는 초자연적 은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논리와 감정으로 경비병을 세우고 돌을 인봉하고 무덤(반석) 지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감정이 자기의 왕이고

논리가 세상의 지배 법칙이지만

하나님은 감정을 초월하고

논리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은혜,

믿음의 열매를 우리에게 증명하십니다.

 

십자가와 반석의 사건은

<믿음>입니다.

아담이 잃었던 믿음,

세상에서 하찮게 여기며 길도 아니고 답도 아니라고 여긴

오직 믿음만을 찾으셨던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죽음으로 증명하면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몸으로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반석> 위입니다.

깨어진 돌과 반석을 시온에 두고 그것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신약성경의 핵심인물 사람의 고백의 기초는 바로 <반석>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셨던 반석,

스스로 깨진 반석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주셨던 반석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반석 위에 우리는 지금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긴 반석의 능력,

우리의 반석이시요 구원이신 하나님!(62:6)

 

흔들릴 없는 믿음의 요체시요

믿음의 터이신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것을 깨시고 생수를 내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주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오늘도 감정으로 우리를 흔들 것입니다.

수없이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감정을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로 우리에게 접근 것입니다.

힘으로 권력의 논리로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무덤(반석) 깨져서 나오지 못하도록 논리로 접근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반석을 깨고 생수를 우리에게 내신

목마른 자에게 누구에게나 주시는 영원한 반석의 샘물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반석을 깨신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신앙의 시작이자 생명줄 입니다.

 

 

 

 

 * yesterday today tomorrow 입니다.

이름이 어제 오늘 내일입니다.

향기가 얼마나 달콤하고 향기로운지 모릅니다.

나무에 가지 색의 꽃을 피우고 나무 그루가 집안에 있으면

집안에 달콤한 향기가 그윽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이니 사실이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봅니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고 열매가 땅에 떨어져서 죽은 굴러다니다

어느 구석에선가 싹을 피우고 나무가 되고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부활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알의 씨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세상 자연을 보면서 부활을 봅니다.

죽었지만 안에 믿음의 생명만 있으면 언제나 다시 부활의 희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꽃과 향기를 세상에 뿌리는 것입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것입니다.

꽃의 이름이 yesterday today tomorrow 것처럼

겨우네 죽은 것처럼 땅속에 있다 부활하는 씨앗처럼

반석을 깨고 나온 그리스도,

땅을 깨고

믿음으로 나온 부활의 생명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는 세상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길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