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리 (마27:45-53)
태어날 때부터입니다. 살면서 잘 못해서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주 받은 생명입니다. 그 저주 받은 인생의 마지막 <큰 소리>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6)
살기 위해서 온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지기 위해서,
버림 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생,
날 곳이 없어 말 구유에 나시고
쉴 곳이 없어 집 없이 떠돌아 다니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관계도 못하시고
버림 받은 갈릴리 어부들이 그의 친구들이고
세상에서 버림 받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의 벗이었습니다.
버림 받은 인생이기에
버림 받은 사람들이 편하고
저주 받은 인생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저주하고 버리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많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담이 입은 가죽옷은 동물을 잡아 희생한 희생의 상징입니다.
물이 없어 모세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습니다.
그 반석 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반석을 지팡이로 쳤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재판석에서 죄인에게 언도를 하듯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서 있는 <반석>을 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빌라도를 통해 언도하고 빌라도가 서 있는 자리는 재판석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있더라:"(19:13)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던 것과 똑 같은 모양입니다.
반석 위에서 반석(하나님)을 치고 심판하던 <모세>처럼
<반석>으로 된 법정에서 <재판석> 앉아 반석되신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이것은 마치 법정에서 재판을 하고 재판장이 죄인을 심판하고 치는 장면입니다.
그 모양이 모세의 때와 빌라도의 때와 동일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심판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주관적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된
하나님의 자의적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사람에게 내어주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이 사건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그 다음 구절에서 이어 말씀합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17:7)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심으로 하나님 스스로를 심판하시고 반석을 깨고 물을 내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하나님을 시험>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시험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보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도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빌라도와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들의 소리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이 외친 소리,
군병과 지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달린 강도가 외친 소리도 그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이면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같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님임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리>입니다.
왜 하나님은 반석을 치심으로 자신을 심판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세상의 소리에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스스로 버리십니까?
예수님의 왜 나를 버리셨나는 소리는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성부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믿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언어이자 원리인 <믿음>입니다.
단 한번도 자신을 증명하는데 힘을 쓰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전부를 거십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싸움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능력으로 힘으로 증명하는 것은
이미 그 속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믿기에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자신을 증명하면 자신은 하나님이 되지만
사단의 논리에 지게 됩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 됨을 증명하는 것은 스스로 사단의 논리인
하나님처럼이라는 의심과 이성과 합리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자신을 치십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듯
자신을 쳐서 세상을 살리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오늘도 자신을 증명하는데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지만 십자가를 믿지만
오늘도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복음은,
십자가는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이룬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버려야 세상을 살립니다.
하나님 자신이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듯
자신을 쳐야 세상을 살리고 영생의 길인 성령이 오십니다.
물은 성령이고 성령은 영생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을 치지 않으면 반석에서 물도
성령도 오지 않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대신해서 자신이 죄의 값을 지는 것입니다.
철저히 죄에 대하여 버림 받아야 의를 얻기에
주님은 자신이 버림을 받아야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류 이래 하나님을 시험하는 인간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인간을 사랑한 만큼 자신을 버리기로 작정하시며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소리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버린
<나>를 향한 창세부터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버림 받은 큰 소리는 나를 향한 큰 외침입니다.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큰 소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피곤한 일상의 흔적으로 파란 하늘에 널린 빨래입니다.
바람에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셨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이끄심을 따라
온 삶을 드린 예수님의 삶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알지 못하지만
빨래는 마름같이
성령의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모르지만
내 삶에 따사롭고 뽀송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칩니다.
오직 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내어 맡긴 자만 누리는
하늘의 평강이
자신을 내어맡긴 그리스도의 큰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절규!
그러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로부터의 사랑이…
아프리카에서 부는 한줄기 바람에…
예수님의 큰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