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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27:27-44)

 

 

세상을 나가는 순간부터 인생은 시험입니다.

시험으로 시작했다 시험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시험의 핵심은 세상이 아니라 안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시험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시험을 거치십니다.

인간이 당하는 시험의 마지막입니다.

 

 

첫째, 수치입니다.

어떻게 수치를 느낍니까?

몸과 옷을 맘대로 하고 싶은 시험입니다.

 

군병들이 시험한 것은 예수님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고 옷을 벗기고 제비를 뽑아 가집니다.

사람이 당하는 수치 중에 몸이 다른 사람에게 끌려 다니고 침을 맞고 뺨을 맞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할까요? 수치를 느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참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못합니다.

그것이 마지막 시험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몸과 옷을 마음대로 것의 내용은 왕이 입는 <홍포> 입히고 머리에 <가시관> 씌으며 <갈대> 오른손에 잡게 하는것입니다.

 

한마디로 <수치> 이유는 <자격>입니다.

사람이 한계를 느끼는 것은 내가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자격입니다.

 

지금 세상이 예수님을 향하여 던지며 행하는 모든 일은

바로 <자격> 대한 <수치>입니다.   

 

왕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초라한 말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놀린 것은 놀이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것은 <숨바꼭질>놀이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떠난 이후 계속적으로 놀이는

< 놀이>입니다.

 

누가 왕이냐는 것입니다.

가짜가 세상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왕이 오셨는데 그들은 진짜 왕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군병이 말입니다.

세상의 힘의 상징, 당시 힘의 상징인 군대의 장관,

빌라도를 시작해서 군병들까지 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패는 바로 <유대인의 >입니다.

 

진짜 왕이 느끼는 세상의 시험은 바로 <수치>입니다.

 

 

 

둘째, 두번째 시험은 <자기> 증명하는 것입니다.

 

군병들의 놀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 가는 사람이 소리 지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27:40)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한 것은 자기를 먼저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27:42)

 

군병과,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는 세상의 대표들입니다.

군병과 빌라도는 힘의 상징이며

지나가는 사람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이며

대제사장과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는 종교의 대표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하는 한가지는 <너부터>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 자신> 먼저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27:43)

 

세상은 그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를 먼저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것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라

내려올 능력이 있는데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면 사람은 수치를 면하기 위해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싸움은 <자기 증명>입니다.

세상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시험합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우리가 속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증명,

자기를 먼저 구원하고,

자기를 먼저 높이고

자기의 것을 먼저 채우는 것입니다.

 

<자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반대는 <자기애>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세상에 보임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 나를 증명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시작도,

마지막도 나를 증명하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네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과 축복을 받은 자임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증명을 숫자로 하려 합니다.

크기로 하려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됨,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증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수치와 조롱과

자기를 증명하라는 말에 나를 증명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있습니까?

어제 말씀 드린 시기와 부러움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세상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을 우리의 시험하는 자극으로 삼습니다.

어떻게 그것에 자유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이 세례를 받으시고 얻으신 것은 하늘의 소리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십자가를 지기로 확증하고 알리고 변화산에서 들린 음성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나를 향하고 주목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세상의 시험으로부터 자유 하게 합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증명하려 합니까?

내가 누군지 세상에서 증명하려 해서 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이 누구라고 증명해 주셔야 우리는 자유 합니다.

세상의 소리,

세상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음성,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예수님을 세상의 시험으로부터 자유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세상 사람들로부터 증명 받으려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증명 받는 각자의 요단강과

각자의 변화산이 있어야합니다.

오직 시간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나의 왕됨을 내려 놓고

오직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는 종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세상에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달려가지 마시고

각자의 요단강과 변화산을 통해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음성을 들을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빠지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자기를 증명하지 않고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세상을 구원하는 말입니다.

 

 

 * 전도를 나갔다가 소를 만났습니다.

마구 날뛰는 소입니다.

 

소가 소가 되려면 자기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구 날뛰지 않아야 합니다.

소는 고삐를 끼우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다녀야 합니다.

그때 종으로서의 소가 됩니다.

마구 날뛰는 소는 잡아 먹힙니다.

 

힘을 자랑함으로,

소의 소됨을 자랑함으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귀에 주인이 타고 다니니 사람들이 인사를 합니다.

머리를 숙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리고 나서도 인사를 받으려합니다.

자기가 주인인줄 알고 힘을 주고 다닙니다.

 

나는 소이고,

나는 나귀입니다.

주인이 없으면 날뛰는 순간 잡아 먹히는 소입니다.

얻어 맞는 나귀입니다.

 

주인행세 안해야겠습니다.

주인됨을 증명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저 가자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는 소와 같이 나귀 같이 사는 인생이어야겠습니다.

 

 

소가,

나귀가

주인 행세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