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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의 고향은 <시기>입니다

 부러움의 고향은 <시기>입니다

 

 

 

 

 

 

 

 

 

 

 

 부러움의 고향은 <시기>입니다. (27:11-26)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 지도자들의 본심은 <부러움>입니다.

그들이 가진 부러움의 고향은 <시기>입니다.

 

일차 재판을 마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를 종교적인 죄를 넘어 정치적으로 사형하기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빌라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저들의 증언에도 한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말에만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27:11)

 

아무리 물어도 예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가?"

소리질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합니다.

 

오늘 이렇게 되어져 가는 이야기의 배경을 빌라도는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시기>입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27:18)

 

총독 빌라도가 바라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넘겨준 이유입니다.

아무리 많은 증언을 하고 이유를 대도 빌라도가 보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시기>입니다.

 

<앎이더라> 말속에는 명확하고 충분히 납득한 상태를 의미를 포함합니다.

빌라도는 종교적 지도자와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근본적 이유는

바로 <부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부러움> 자라서

<시기> 되고 시기가 결국 말도 안되는 증언을 하게하고

거짓 증언을 하게하고

논리도 이성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시기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대 땅과 주변에 퍼지면서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확정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21:15)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일은 앞에서 행하신 사람을 고치시고

성전에서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일을 찬양할만한 일들로 여겼습니다.

일이 있고 바로 이어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노를 발했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던 것은

그들로 노하게하고 부러움을 사고 시기를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노하고 후에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21:23)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은 부러움 때문이었습니다.

부러움에 불을 지핀 것은 사단입니다.

부러움으로부터 시기는 시작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일어난 죄의 시작은 바로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러움이 일어나고

부러움을 통해 시기가 찾아옵니다.

결국 시기는 모든 것을 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농부 이야기는 바로 이야기입니다.

열매를 요구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다시 보냈을 그들은 바로 시기심으로 아들도 죽입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마21:38]

 

그가 가진 것이 부럽고 질투가 났던 것입니다.

그가 가진 ,

그가 얻는 인기와 ,

그가 누리는 명예가 부러운 것입니다.

 

말씀도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던지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대화 후에 나온 예수님의 비유들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늘로부터냐 땅으로서냐?'

' 아들이 있는데 아들은 간다하고 가지 않고 아들은 안간다 하고 이야기'

'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세우고 종을 보내나 종도 치고 죽이고 아들도 죽인 이야기'

'임금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청한 자들이 오지 않은 이야기'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부활에 대한 이야기'

'칠형제의 장가 간후 부활 누가 아내의 남편이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

'율법 중에 가장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

 

모든 이야기의 대화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들

사두개인들과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이야기의 결과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6)

 

 

백성은 자신들보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 못하는 것이 없고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것을 보는

지금 현재의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부럽다가 결국에는

<시기심> 발생하여

죽이기로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부럽고 대단해서 감히 묻지도 못하지만

자기와 비교하지 못할 상대임을 알게 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패망의 근원은 <부러움> 입니다.

다윗이 백성으로부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소리가

그를 번민케 했습니다.

처음은 <부러음>으로 그러다 <시기> <질투> 자신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죄악이 세상에 들어 것은

사단의 하나님의 자리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입니다.

자리에 대한 사단의 마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습니다.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에게 질투하십니다.

그런데 사단을 통해 시기의 마음에 눈을 뜨기 시작한 세상이 되자

세상은 나보다 나은 사람,

나보다 뛰어난 사람,

나보다 놀라운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반드시 사람을 내려 앉히고 내가 자리에 올라야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의 시작은 <시기>입니다.

라헬과 레아의 싸움 그리고 그의 빌하와의 모든 문제의 시작은 <시기>입니다.(30:1)

요셉의 고난의 시작,

종으로 팔려가는 이유는 바로 형들의 부러움으로 시작된

<시기와 질투>입니다. (7:9)

 

인생이 언제 행복하지 못합니까?

시기와 질투 속에 살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죄의 고향> <비교> 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러움을 가지게합니다.

사람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사람은 나보다 살고

사람은 나보다 남편이 좋고

사람은 나보다 아내가 이쁘고

사람은 나보다 사역을 잘하고

사람은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부러움이 쌓이면 <시기> 됩니다.

 

세상의 죄는 시기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 자리가 부럽고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그렇게 차지한 죄된 세상에서의 하나님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서 벌이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총리> 빌라도에서 총리라는 말의 원어 '헤게몬'

영어의 헤게모니(hegemony) 어원입니다. 

'지도권, 주도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세상은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의 싸움입니다.

모든 주도권의 싸움은 <시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주도권을 가진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놓치기 싫어서

헤게모니를 이용하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빌라도는

백성들의 외치는 소리에

분별력을 잃고 예수를 내어주게 됩니다.

 

자기의 헤게모니, 주도권, 권력을 놓치기 싫은 마음입니다.

 

그런 세상에 주님의 십자가는 주도권,

힘과 권력을 내려놓고 시작하신 인생입니다.

힘과 권력을 한번도 자신을 위해 사용한 적이 없는

요셉처럼

주님은 평생 자기를 위해 거처할 집도 없이 지내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자기의 권력과 자리를 포기하지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자리를 주셔도

우리는 <부러움> <시기> 만나게 됩니다.

 

처음부터 부러움과 시기를 없앨 갈릴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어떤 모함하는 증언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시기> <부러움> 해결 답은 무엇일까요?

 내일 계속합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1,2 구역이 베레나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베레나교회 교인중에 결혼식이 있어 반은 그쪽으로 참석을 하시고

반만 참석한 모임이었지만 베레나교회 교인들의 정성과 준비에

구역식구들이 감동한 시간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의 워십댄스, 청년들의 찬양,

그리고 정성으로 준비하고 맛이 뛰어난 성도들의 찬치식사,

그리고 이곳저곳 청소를 하고 데코레이션에 신경을 많이 마음을 읽으시고

참석해주신 구역성도분들께서 많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준비한 선물과 전도지를 가지고 집집마다 전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처음 전도를 하시는 분도 계시고

한국에서 수십년 전에 하던 전도를 이제 다시 하신다는 분도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하시는 말씀은 성도들과 아이들이 눈망울과 눈속에 보이는 행복감입니다.

없이 살아도 어떻게 이렇게 행복하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선물로 전달한 밀가루 하나와 과자 개에

이들은 다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릅니다.

작은 식사에 행복감을 감추지 못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팔짱을 끼자고 말하는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일까요?

 

우리는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에 마음이 많이 갑니다.

내가 가진 작은 밀가루 통의 행복보다

남들이 가지고 내가 가지지 못한 가지로 불안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그들과 우리가 다른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내가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있는 여유와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가 오늘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너무 많이 가져도 많이 가진 것이 보이는 한국과 한국교인들…

자주 현지인들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고

얼마나 감사한 것이 많은지…

오늘도 우리 베레나 성도들로 인해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함께해주신 1,2 구역 성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